[작가 후기]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한 아이가 푸른 눈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푸른 눈을 한 그 아이의 모습을 그려보다가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슬픔이 어린 그 아이의 목소리, 왠지 측은한 생각에 그 아이를 위로해주는 척했다. 하지만 사실 측은함보다는 ‘분노를 느꼈다.’
『가장 푸른 눈』은 그 일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쓴 작품이다. 왜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르는지, 또한 왜 그렇게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녀의 욕망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인종적 자기 혐오였다. 20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자기 혐오에 빠져드는지 궁금했다. 누가 그녀에게 이야기해준 걸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별종이 되는 것이 나을 거라고, 그녀가 부족하다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저울로 재면 무게가 조금 덜 나간다고 누가 말한 걸까? 이 소설은 그녀를 바라보는 그런 시선에 의문을 제기한다.
[화자의 회고]
모두가 쉬쉬했지만, 1941년 가을에는 금잔화가 피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금잔화가 피지 않은 것은 피콜라가 자기 아버지의 아기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조사해 보았더라면, 아니 조금만 덜 우울했더라면 우리 씨앗만 싹을 틔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모든 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했다. 그해에는 호수 앞의 정원들에서도 금잔화가 피지 못했다. 하지만 피콜라의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만을 바라던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걸어놓은 마법에만 신경을 썼다. 우리가 씨앗을 심은 후 주문만 제대로 외웠다면 그 씨앗들은 꽃을 피울 것이고,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라 믿으며.
언니와 나는 한참 후에야 씨앗에서 초록색 싹이 나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인정했다. 일단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자, 우리는 잘못을 서로 미루며 싸웠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언니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건 순전히 내 탓이었다. 내가 씨앗을 너무 깊이 심었던 것이다. 그 땅이 불모지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피콜라의 아버지가 그의 씨앗을 검은 피부의 자기 딸에게 뿌렸던 것처럼 우리도 검은 흙으로 덮인 작은 땅에 씨앗을 파종했다. 우리의 순수와 믿음은 피콜라의 아버지가 지녔던 욕정과 절망만큼이나 비생산적이었다. 지금 분명한 것이 있다면 희망, 두려움, 욕정, 사랑 그리고 슬픔, 그 모든 것 중에서 피콜라와 불모의 땅만 남았다는 것이다. 촐리 브리드러브는 죽었고 우리의 순수도 사라졌다. 그 씨앗들도 메말라 죽었고 피콜라의 아기도 죽었다.
‘왜’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왜’라는 말의 해답을 찾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어떻게’라는 말에서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
[자기 혐오]
브리드러브 가족은 공장의 인원감축으로 생활이 일시적으로 힘들어 상점 자리에서 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난한 흑인이기 때문에 거기 살았다. 자신들이 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곳에 머물렀다. 대대로 물려받는 가난이 망신스럽긴 해도 그들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추한 몰골은 그들만의 것이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추하지 않다는 확신을 줄 수 없었다.
행실이 추한 아버지 촐리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브리드러브 부인, 새미 브리드러브 그리고 피콜라 브리드러브-은 사실이 그렇지 않은데도 자신들이 추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들의 눈, 그들의 작은 눈은 좁은 이마 밑에 붙어 있었다. 일자로 이어진 진한 눈썹과는 달리 이마 선은 모근들이 불규칙하게 자리잡아 울퉁불퉁했다. 그들의 코는 오뚝했지만 구부러졌고 콧구멍은 오만해 보였다.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귀는 약간 앞쪽으로 돌출해 있었다. 입은 보기 좋게 생겼지만 전체 얼굴에 가려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추해 보이는지 자세히 살펴봐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문득 그들이 추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믿음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이 건네준, ‘추함’이라는 외투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든 것과 같았다.
신은 말했다. “너희는 추한 족속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말을 받아칠 만한 것이 없다. 광고 게시판, 영화, 사람들의 시선은 신의 말을 뒷받침할 뿐이다. “맞아요. 당신이 옳아요.” 그 들은 말했다. 그들은 손에 추함을 받아들고, 망토처럼 그것을 걸치고 세상을 배회했다.
[촐리 브리드러브]
그녀는 자신이 만질 수 있고, 그렇기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그가 아주 싫어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분노와 발화되지 않은 욕망, 이 모두를 아내에게 쏟아부었다. 아내를 미워하면서도 자신은 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촐리는 어린 시골 소녀와 수풀 속에서 재미를 보려다, 두 명의 백인 남자에게 들켜 놀란 적이 있었다. 그들은 촐리의 엉덩이에 손전등을 비추었다. 촐리는 겁에 질려 하던 짓을 멈췄다. 그들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손전등 불빛은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그 짓을 해, 깜둥아. 잘해봐, 깜둥이. 잘해보라고.”
손전등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까닭 모를 이유로 촐리는 그 백인들을 증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소녀를 증오하고 멸시했다.
[브리드러브 부인]
그녀는 가족 간의 애정이 깊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관대하기까지 한 부잣집에서 일했다. 그녀는 그들의 집을 보고 아마포 냄새를 맡고 실크 커튼을 만지며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아이의 분홍빛 잠옷, 수가 놓인 흰 베갯잇, 가장자리를 푸른 수레국화로 장식한 시트들. 그녀는 이상적인 가정부가 되었다. 가정부라는 역할을 통해서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은백색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따뜻하고 깨끗한 물을 자기로 된 욕조에 받아 피셔 집안의 어린 딸을 목욕시켰다. 보풀 있는 수건으로 아이의 몸을 닦아주고 귀여운 잠옷을 입혀주었다. 그런 다음 노란 머리를 빗겨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즐기면서, 아연으로 도금한 욕조도, 풍로에 데운 물도, 부엌 싱크대에서 빨아 먼지가 폴폴 나는 뒷마당에서 말린 얇고 뻣뻣한 수건들도, 거친 털실처럼 이리저리 얽혀 있는 덥수룩한 검은 머리카락도 없었다.
그녀는 곧 자신의 집안일을 돌보는 데 흥미를 잃었다. 그녀가 사는 물건은 오래가지 않았고, 아름답지도 멋있지도 않았으며, 상점을 개조한 누추한 건물에서 빛도 발하지 못했다. 점점 더 그녀는 자신의 집과 아이들 그리고 남편에게 소홀해졌다. 집과 가족은 잠들기 전에 잠시 떠오르는 잡념 같았고, 하루 중 자투리 시간인 새벽이나 늦은 밤 같았다. 그때는 피셔 가족들과 보낸 하루를 더 밝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만드는 암울한 시간이었다. 피셔 씨의 집에서는 물건들을 정리하거나 닦을 수도 있었으며, 단정하게 줄을 맞출 수도 있었다. 그곳에는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어 편치 않은 한쪽 발의 터벅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름다움과 질서, 청결함과 칭찬을 발견했다.
그녀는 몇 주 동안, 심지어 몇 달 동안 손도 대지 않을 음식이 높이 쌓여 있는 찬장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상자째로 산 야채 통조림, 설탕 과자, 작은 은접시에 담긴 리본 모양의 사탕과자 위에 여왕처럼 군림했다.
자신의 일로 갔을 때는 모욕을 주었던 빚쟁이들과 상점 종업원들도 피셔 집안의 가정부로서 찾아가면 존경심을 보였고 심지어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는 색이 조금만 칙칙하거나 손질이 조금만 되어 있지 않아도 쇠고기를 사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샀을 법한, 악취가 조금 나는 생선도 생선 장수의 면전에 던져버렸다. 그 집에서는 권력과 칭찬,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새미 브리드러브]
새미는 욕설을 하고 집을 나가거나 싸움에 끼어들었다. 새미는 열네 살 무렵, 벌써 스물일곱 번이나 가출한 경험이 있었다. 한 번은 버팔로에서 석 달 동안이나 머물다 돌아왔다. 강제로 끌려왔는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돌아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새미는 뿌루퉁해 있었다.
[피콜라 브리드러브]
“애야, 뭘 도와줄까?”
그녀는 약간 튀어나온 듯한 배에 두 손을 대고 서 있었다.
“아마, 아마 당신은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무슨 일?”
“저는 이제 학교에 못 가요.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거에요.”
“어떻게 도와줄까? 말해봐, 겁먹지 말고.”
“제 눈을요.”
“네 눈이 어때서?”
“눈을 푸르게 해주세요”
(BOOK : 2022-001-0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