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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도서]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P. D. 제임스 저/이주혜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지은이: P. D. 제임스
옮긴이: 이주혜
출판사: 아작
출판년: 2018년 8월 15일 초판 1쇄 

먹책모 11번 째 도서로 내가 고른 책이다.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18년에 사두고 아직도 안 읽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모임의 취지 중 하나가 '사놓고 안 읽는 책 읽기'였기 때문에, 난 전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안 읽은 이 책을 골랐다.
이 책을 샀던 이유는 서점 사이트 메일에 추천으로 떴었고, 표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난 추리소설을 좋아하기도 하고.

사실 이 책을 전혀 안 읽은 건 아니다. 초반에 버니 프라이드가 죽는 부분까지는 읽었다. 약 일 년 전에. 그 후로는 왠지 손이 안 가 안 읽고 있었다.
그래서 이참에 얼른 읽고 끝내버리자, 싶은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잡은 이 책은, 지난 번에 그렇게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무색하게 굉장히 술술 잘 넘어갔다.
우선 코델리아 그레이라는 탐정 자체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영리하고 용감하면서도 똑부러지고 올곧은 캐릭터인 코델리아는 혼자 일하는 독립탐정으로 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어딘지 미숙한 면도 있지만, 그런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로 업무를 한다.
그리고 벌이가 시원치 않을지언정 탐정이란 직업 자체에도 진지하게 임하면서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보자고 결심하는 캐릭터이다.

최근 읽은 추리소설들의 탐정들은 대체로 탐정이 부업이거나 굳이 생업이 필요 없는 가운데 무료함을 달래려고 탐정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코델리아가 탐정이라는 일을 직업으로 대하는 자세가 오히려 신선하고 나까지 덩달아 초심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라 더 즐거웠던 것 같다.

코델리아에게 들어온 의뢰는, 정확히는 버니 프라이드에게 들어온 의뢰였지만 버니가 죽었기 때문에 코델리아가 맡게 된다.
그 의뢰는 그리 어려울 건 없어 보인다. 유명 교수가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한 의뢰이기 때문이다. 이 죽음은 의문스러운 사고사나 타살도 아니고, 경찰도 이미 자살로 결론짓고 교수도 자살이라 생각하는 단순한 죽음이다.
다만 교수는 갑자기 대학을 자퇴하고 어떤 집안의 정원사로 들어간 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심리상태, 즉 왜 자살을 결심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었다.
척 봐도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는 일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쉬운 일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하지만 당연하게도, 일은 점점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사실 예상과는 다른 방향이라고 해도, 추리소설을 많이 접한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 의외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은 굳이 표현하자면 굉장히 정직한 느낌의 추리소설이다. 주인공 코델리아의 성격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깔끔하고 담백하면서 복잡한 기교나 트릭은 없지만 클래식하고 단정한 추리물인 것이다.
조금 결이 다르지만, 얼마 전 본 영화 나이브스 아웃이 생각나는 소설이기도 했다. 물론 나이브스 아웃은 훨씬 유머러스하고 비밀통로의 저택이나 유산 상속 등 화려하고 (사망사건이 발생한 추리물에 이런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화사한 느낌이지만, 군더더기 없이 정제되고 정통적인 느낌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소설을 덮고 나면 굉장히 깔끔하고 개운한 기분이 되는 만족스러운 추리물이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여성 탐정이 나오는 추리 '소설'은 이게 처음이다.
미스 마플이나 미스 피셔 같은 드라마는 봤지만, 이제껏 읽은 소설은 모조리 남자 탐정이 나왔던 것이다.
드라마도 물론 재미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여성 주인공 시점으로 보는 사건과 모험은 남성 주인공 시점과는 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굉장히 이입이 쉬웠다!
정말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이 책 자체가 거의 45년 전에 쓰여졌다곤 믿기 힘들 정도로 세련되고 우아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작가가 주인공의 심리나 주변 상황을 묘사하는 것들이 굉장히 섬세하면서도 드라마틱하다기 보단 무척이나 현실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자라서 듣는 말들, 여자라서 부딪히는 문제들, 여자라서 걱정하는 문제들 등등이 나오니 굉장히 공감이 가고 절로 이입이 됐다.
나는 이제까지 조금 더 주인공에 이입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재미와 몰입도가 달라질 줄은 정말 몰랐다.
먹책모 모임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다들 거기에 공감하는 걸 보면 나만 느낀 감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서로 호감을 느끼긴 커녕 오히려 적대감을 느끼는 편인 여성들끼리 연대하는 과정들도 나오는데, 그 부분에 대한 묘사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감정적이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고 갑작스런 화해와 이해도 아닌 필요에 의한 강력한 연대. 
뭐랄까, 굉장히 프로패셔널하고 어른스러우며 우아한 연대라는 생각이 들며, 연대라는 건 반드시 애정과 끈끈한 유대와 사랑 등에 기반하지 않아도, 당사자들이 정직하고 공정하다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현실에서 가능한가는 차치하고.


아무튼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으니 당연히 주인공에 대한 애정도도 상승한 나는 바로 코델리아 그레이 시리즈를 찾아봤고, 다음 편이 번역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도 단숨에 찾아 읽었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도 그렇고 2편인 <피부밑 두개골>도 그렇고, 코델리아 그레이 시리즈는 추리소설을 넘어 군상극을 연상케하는 소설이었다.
전반적으로는 굉장히 단정하고 정직하고 우아하면서도 품위있는 느낌이고. 
이렇게 두 권을 끝으로 작가가 더는 코델리아 그레이 시리즈를 쓰지 않고 달글리시 시리즈로 넘어갔다는 게 아쉬움을 넘어 서러울 정도였다.
결국 나는 서러움을 인터넷에서 코델리아 그레이를 서치해 보고 팟캐스트에서 관련 팟캐를 들으며 달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멋진 여성 탐정물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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