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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역사)

[도서]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역사)

진중권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5점

지은이: 진중권

출판사: 천년의상상
출판년: 2020년 2월 14일 개정판 1쇄 

몇 년 전 인터넷에서 '루비'의 SNS 계정이 이슈가 됐던 적이 있었다.
평소 신랄하기로 유명한 미학자 진중권 교수님이 '냥줍'을 하더니, 곧 입양 보낼 거라는 말이 무색하게 고양이 사진을 엄청 올리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고양이한테 '루비'라는 귀여운 이름을 붙이더니 (그게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약칭인 것은 한참 후에 알았다) 결국 루비의 페르소나로 운영되는 SNS 계정까지 열리고야 만 것이었다.
그때 다들 (실례되는 말이지만) 진중권 교수님이 고양이의 숙주가 된 게 아니냐고 할 정도였던 걸 기억한다.
하지만 어느날 루비 계정은 홀연히 사라졌고, 그 후로 나는 종종, 아니 실은 아주 가끔 루비의 안부를 궁금해하곤 했다.

그러던 중 서평단에 이 책이 올라왔다. 소개글을 꼼꼼히 읽어보니 심지어 서문부터(!) 오랜만에 보는 루비의 페르소나로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못 본 사이 진중권 교수님의 고양이 사랑, 아니, 고양이 사랑을 넘어선 고양이 앓이는 더욱 심각해져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사실 알고보니 이 책은 몇 년 전 이미 발간된 책의 개정판이었다)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 책이었다. 심지어 책의 목차도 내가 좋아해 마지 않는 신화적인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호기심을 못 이기고 신청한 결과 서평단에 선정되어 받아본 책은 생각보다 컴팩트했다. 
그리고 문체도 내용도 각오(?)했던 것보다 좀 라이트한 걸 본 나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요즘 마찬가지로 진중권 교수님 저의 <감각의 역사>를 보고 있는데, 이 책은 나에겐 상당히 어려워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2주 안에 책을 읽고 서평을 써야 하는데, 책이 진도가 나가지 않거나 너무 어려우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책장은 술술 넘어갔다.
오랜만에 보는, 반갑기까지 한 루비가 쓴(?) 글을 지나서 읽은 첫 장, 고양이의 창세기는 정말 귀여운 이야기로 마무리 지어졌다.

루스탐이 그 이상으로 아름다울 것이 없다고 느낀 게 무엇이었던가. 피어오르는 연기, 타오르는 불길, 쏟아지는 별빛이 아니었던가. 그 연기는 고양이의 털이 되고, 그 불길은 고양이의 혀가 되고, 그 별은 고양이의 눈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가지가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진 것. 그것이 바로 고양이다.
<p. 26, 01 고양이의 창세기 - 연기 한 줌, 불길 한 자락, 빛나는 별 두 개 中>

이렇게 고양이의 창세기로 시작한 이 책은, 고양이가 전 세계에 퍼지게 된 경위와 더불어 고대인들의 고양이에 대한 인식을 거쳐 중세시대와 근세에 고양이가 어떻게 악마화 되고 그로인해 어떤 핍박을 받았는가에 대한 내용을 거쳐 다시금 위상과 이미지가 복원되었지만 여전히 대상화되고 타자화 되며 '있는 그대로의 한 존재'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근대의 고양이를 지나 그 후 여전히 논쟁이 되고 있는 동물과 인간의 구분과 천부적인 위계의 여부에 다다르고 마침내 결국 인간인 내가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고양이가 아닌 인간인 나를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고양이에서 마무리된다. 
결국 이 책은, 고양이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역사를 다룬다고 보면 될 듯 하다.

책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저자의 루비에 대한 팔불출적 면모는 당연하고, 고양이에 대한 찬양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고양이가 겪어온 격동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지식 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2장에서는 이집트에서 신격화되고 사람과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존중받고 사랑받던 고양이에 대한 내용이었다.

고양이를 잃으면 온 가족이 눈썹을 밀고 애도를 하며 사체로 미라를 만들어 부바스티스Bubastis시에 매장했다. '부바스티스'는 '바스테트의 집'이라는 뜻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양이에 바쳐진 도시였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고양이 신을 기리는 축제가 열렸는데,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축제가 당시 이집트 전체에서 "그 위엄과 중요성에서 첫째"가는 행사였다고 한다.
<p. 35, 02 이집트인은 다만 고양이를 더 사랑했을 뿐 中>

캄비세스는 자신의 전열 앞에 개, 양, 고양이, 따오기 등 이집트인들이 신성시하는 동물을 배치시켰다. 그러자 이집트인들은 행여 자신들이 숭배하는 이 동물들이 다칠세라 즉각 작전을 중단했다. 이로써 캄비세스는 펠루시움을 함락시키고 이집트로 들어가는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p. 37, 02 이집트인은 다만 고양이를 더 사랑했을 뿐 中>

이들 동물 중 하나라도 고의로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그가 죽인 것이 고양이나 따오기라면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 일반 백성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가해자에게 잔혹하게 보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이 일은 재판을 기다릴 새도 없이 이루어진다.
<p. 39, 02 이집트인은 다만 고양이를 더 사랑했을 뿐 中>
첫 번째 인용문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두 번째와 세 번재 인용문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게 된다. 
고양이(를 위시한 몇몇 동물들)가 사람은 물론 국가보다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과연 신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에서 비롯된 것일까?
솔직히 나는 이 장의 제목처럼, 신앙보다는 고양이와 몇몇 동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게 더 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대체 이집트인들이 고양이를 보며 했던 생각, 느꼈던 감정은 어떤 거였을까? 너무 궁금해진다.


3장은 이런 고양이가 그리스로 건너가 어떻게 대우받았는지 보여준다.
동물과 인간을 동일시했던 이집트와 달리 그리스에서는 둘 사이에 명백한 위계를 두었고, 인간과 동물은 구분지어졌다. 
때문에 고양이의 모습을 한 고양이 신을 숭배한 이집트와는 달리 그리스에서는 아르테미스처럼 사람의 형상을 한 신에 부수적으로 고양이가 따라붙는 식으로 그 숭배 양상이 변화했으며, 사실상 고양이는 숭배의 대상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그대는 곤경에 처한 고양이를 보면 통곡하지만, 나는 그놈을 기꺼이 죽여 껍질을 벗긴다오." 이집트에서 고양이 살해를 최고의 범죄로 규정한 것은 고양이를 '주체'로, 즉 인간과 대등하거나 혹은 우월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었으리. 저 대사에는 이 이집트 풍습에 대한 잔인한 비웃음이 묻어난다. 고양이를 한갓 '객체'로, 즉 인간이 소유한 물건으로 보는 자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이다.
<p. 50, 03 아르테미스, 다이아나, 루나라는 이름 中>

4장에서는 고양이가 유럽으로 건너와 겪게 된 일들, 그리고 서구 사회가 기독교 사회로 접어들며 또다시 달라지게 된 고양이의 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10세기에 웨일스 지방을 다스렸던 하우얼 다(Hywel Dda, 880-950) 왕의 법률에는 고양이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중략)
남의 고양이를 죽이면 돈으로 이 값을 치르거나, 아니면 고양이 사체를 덮을 만큼의 곡식으로 배상해야 했다. 독일의 작센 지방에도 비슷한 법이 있었다. 고양이 값을 곡식으로 치르게 한 것은 당시 고양이를 쥐 잡는 가축으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준다.
<p. 62, 04 성서에는 왜 고양이가 등장하지 않을까 中>
처음 유럽에 고양이가 전파되었을 때 인간과 고양이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록에 따르면 고양이는 염소 정도의,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동물로 여겨졌다.
곡식을 훔쳐먹는 쥐를 잡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것이 기독교에서 고양이를 악마의 짐승으로 규정하고 고양이에 대한 악담을 퍼뜨리며 점차 변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래도 교회와 고양이의 사이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내가 위 규정을 스크래핑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
이 책과도 전혀 상관 없는 내용이긴 하지만, 북유럽 신화에 보면 오딘과 로키, 회니르가 실수로 흐레이드마르의 아들 오트르를 죽이게 되자 흐레이드마르는 죽을 당시 수달의 모습을 하고 있던 오트르의 가죽을 벗겨 그 수달 가죽의 안팎을 완전히 덮을 수 있을 만큼의 황금을 배상으로 요구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이 가죽을 덮는 과정에서 <반지의 제왕> 모티브가 된 안드바리의 반지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건 정말로 다른 얘기니 차치하고, 난 항상 이 부분을 볼 때 저 '수달 가죽을 완전히 덮을 수 있는'이란 부분이 신화적 상상력이나 꾸며낸 규칙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의 이 부분을 보면서 그 규칙은 신화에서 날조된, 현실과 유리된 규칙이 아니라 실제로 북유럽 쪽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던 규정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신화 또한 현실에 기반한 것이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장의 제목에 대한 답도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이유는 예상외로 무척이나 간단해서 처탈할 정도였다.
그저 성격이 쓰여지던 구약 시기에 유대인이 살던 지역에는 고양이가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일 따름이었다. 본 적도 없는 동물을 쓸 수야 없지 않겠는가.


5장과 6장에 들어서면 인류의 고양이 적대시는 더 본격적이 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와 인노켄티우스 8세는 고양이를 사탄, 혹은 사탄과 직접적 관계가 있는 동물로 공식 규정하고 사람들은 고양이를 더이상 아끼지 않으며 심지어 제물로 화형하기 시작한다.

인간을 대신하여 죽어간 또 다른 존재는 동물이었다. 이 주술 신앙은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 이미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굳어져, 교회에서도 그 관습을 없애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것을 기독교화하여교회 안에 품는 길뿐이다.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과 같은 교회의 명절은 대부분 기독교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동지, 추분, 춘분과 같은 절기에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목적으로 행해졌던 이교의 여러 축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 축제도 그렇게 요한의 탄생일이 되어, 그의 이름으로 동물을 태워 죽이는 이상한 일이 해마다 벌어진 것이리라.
<p. 87, 06 고양이 화형식 中>
영화 <미드소마>가 생각나는 대목이다.(사실 난 아직 미드소마를 안 봤다. 오늘 볼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잔인하게 고양이를 산 채로 태워 죽이거나 높은 곳에서 던지는 풍습은 19세기 초반까지도 계속 행해졌다. 끔찍해라.


7장에서는 그 유명한 '고양이 대학살'이 나온다. 그리고 드디어 동물 학대 금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유럽에는 존 오즈월드의 <자연의 절규 혹은 학대받는 동물을 위한 자비와 정의의 호소> 등 동물에 대한 도덕적 처우를 주장하는 철학 에세이들이 솓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p. 100, 07 고양이 대학살과 동물학대법 사이 中>

동물 학대를 법적으로 금지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1822년 '소 학대법'에 이어 1835년 영국 의회는 보호 범위를 모든 동물로 확대한 '동물 학대법'을 통과시킨다. 이 법안이 동물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심성이 거친 하층 계층을 통제하기 위한 생체공학의 일환이었는지는 아직 논란이 되고 있다.
<p. 100-101, 07 고양이 대학살과 동물학대법 사이 中>
하지만 아직까지는 동물의 주체성이나 동물의 권리를 인정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좋게 봐주면 동물의 고통에 시혜적으로 자비를 베풀자는 의도였을 것이고, 좀 더 현실적으로는 도시화가 진전되며 농촌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을 문명화 시키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이후로도 이 책에서는 (이 책의 주제는 고양이이기 때문에) 고양이로 대변되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 정립이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관련 담론이 오가는 것에 대해 말한다.
여전히 동물은 인간과 같을 수 없다는 주장과 동물과 인간은 대등한 존재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저자의 결론은, 결국 동물도 이제는 객체에서 벗어나 주체로서 대접받아햐 한다는 것이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남은 느낌이다.

얼마 전에, 마찬가지로 예스24 서평단에 선정되어 받은 <우리가 지켜햐 할 동물들>이란 책을 봤다.
제목에서 보이듯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책이었는데, 아주 아름다운 삽화로 멸종 위기의 동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책을 보면서도 그랬지만, 이 책을 보면서도 마찬가지로 인류의 동물에 대한 잔인함에 대해 돌이켜 보게 된다.
하기야 인간은 같은 인간에게도 피부색 등의 이유로 잔인하게 구니 완전히 다르게 생긴, 심지어 말도 통하지 않는 동물들에게 잔인하게 구는 것은 더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생명체이자 존재로서 다른 생명체이자 존재의 고통에 어떻게 그렇게 무감할 수 있을까?

요즘에는 동물권 보호에 대한 운동이 점차 가시적이 되어 가고, 이전보다도 한층 더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지구의 환경을 보호하자는 차원을 넘어 동물의 권리를 보장하고 그들이 불필요하게 겪는 고통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그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생의 권리가 있고 사고하고 고통을 인지할 수 있는 존재임을 지각하자는, 좀 더 적극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동물권과 환경 보호를 위해 비거니즘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으며, 비거니즘까지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동물을 존중하는 방식의 소비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비단 실천의 영역에 있어서만 어려운 게 아니라, 여전히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개념과 바운더리조차 헷갈리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이는 스스로 공부하고 치열하게 사유해야 하는 문제인 것 같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revie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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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님! 좋은 리뷰 감사 드립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

    2020.03.05 15:44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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