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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

[도서] 낮술

하라다 히카 저/김영주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제목: 낮술

지은이: 하라다 히카

옮긴이: 김영주 

출판사: 문학동네

출판일: 2021년 6월 7일 초판 발행 

 

요즘 내 밥친구는 <와카코와 술>이라는 드라마이다. 혹은 <고독한 미식가>나.

매일 새로운 가게에 가 식사를 하거나 술을 한 잔 하며 맛있는 음식과 술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는 것.

별다른 내용이 없지만 왠지 힐링되기도 하고 내 식욕도 같이 돋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리뷰어클럽에서 <낮술>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을 서평단을 모집하는 걸 발견했다.

 

낮술! 벌써부터 아름다운 울림이다.

전에 읽은 모 카피라이터의 에세이에서 '낮술'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에서의 정지버튼 같은 것이라고 평한 걸 봤었다.

일상에 쉼표를 찍어주는 정지버튼. 

가만히 생각해보면, 낮술이란 건 항상 내게 좋은 기억만을 남겨주었다. 밤에 마시는 술은 좀 더 본격적인, <낮의 목욕탕과 술>의 저자인 구스미 마사유키에 따르면 '이유가 있는' 술이다. 한 주가 힘들었으니까, 좋은 일이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으니까, 온갖 '니까'가 붙는 술. 하지만 낮술은 그보다 훨씬 가볍고 즉흥적인 면이 있다.

무더운 여름날, 하늘은 파랗고 해는 눈이 부시도록 밝고, 너무 쨍해서 건물 밖에 나서기만 해도 땀이 쏟아지는 날 점심 시간에 직장 동료와 근처 식당에 가서 '딱 한 잔 씩만 마시자.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라고 하면서 시원한 초계국수와 함께 마시고 오는 병맥주. 

신입을 막 벗어나던 시기의 어느 날, 계속되는 야근과 업무 스트레스에 지친 동기들과 몰래 빠져나가서 일부러 회사에서 좀 떨어진 편의점에 가 충동적으로 사서 비장하게 짠을 하고 모두들 원샷해버린 캔맥주. (원래는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나간 거였다)

가볍게 비가 내리는 토요일 낮에, 와인바를 하는 친구의 가게 창가석에 앉아 항상 갖고 다니는 수첩에 낙서도 하고 좋아하는 책도 읽고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한 모금 씩 소중하게 마시는 와인 한 잔.

추운 겨울날 카페에서 술을 넣어주는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몸을 녹이며 마시는 독특한 술.

잔뜩 취해서 숙취로 고생하거나 실수를 할 일도 없는, 뒤끝도 없고 좋은 기분만을 남겨주는 술이 바로 낮술인 것 같다.

그런 낮술을 제목으로 앞세운 책이라니 흥미가 들었다.

 

이 책에는 술도 맛있는 음식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마음에 쏙 드는 문장들이 몇몇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바로 검색이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 맛집앱을 살펴보는 게 식도락 소설의 주인공이나 미식가로선 실격일지 모르겠지만, 이건 쇼코에게 더없이 소중한 한 끼, 한 잔이다. 자신은 미식가가 아니므로 감에 의존하지 말고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야 한다.

p.12

항상 검색엔진에서 'XX동 맛집'을 검색하는 나에게는 무척이나 공감가는 문장이다.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은 항상 감으로 음식점에 들어가고 언제나 성공하지만 (물론 이런 드라마는 실제 음식점 소개의 역할도 하니 실패했다는 내용이 나올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현실은 그렇지 못한 법. 한정된 예산과 한정된 시간, 한정된 위장을 가지고는 한 번의 맛집도 신중해야 한다. 가끔이야 모험을 할 수도 있겠지만 (쇼코가 이 책의 마지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감만 믿고 모든 식사를 운에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생선회 뿐만 아니라 고기에도 이 법칙이 꽤 들어맞는다. 구운 고기는 맥주랑만 먹기보다 밥과 함께 먹는 게 확실히 더 맛있다.

p.17

이 부분이 좋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술을 마시는 것도, 맛있는 밥을 먹는 것도 좋아하는 나라 기존에 함께하던 밥친구들은 어딘지 하나씩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가령 대식가라 밥은 잔뜩 먹을 수 있지만 술은 한 방울도 못 마시는 수입인테리어업자 아저씨라거나, 밥보다는 술에 비중을 두고 안주는 항상 소량만 시키고 밥과 함께 먹는 일은 드문(없는?) 술맛을 볼 줄 아는 혀를 가지고 태어난 회사원이라거나.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밥과 술을 함께 먹는 묘미를 알고 있다! 너무 기쁘다!

 

소설은 예상대로 쉽게쉽게 읽히면서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가볍고 산뜻하고 느긋하게 맛을 음미하는 장면이 잔뜩 나오는 책이었고.

물론 주인공 쇼코의 삶은 그렇게 가볍고 산뜻하지만은 않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한 갑작스런 임신으로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몇 번 데이트를 했을 뿐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남자와 급하게 결혼했다가 이혼을 하고 아이는 남편이 데려가 한 달에 한 번도 겨우겨우 만나며 친구가 운영하는 심부름센터의 직원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삶.

 

사실 쇼코의 결혼은 처음부터 잘 될 수가 없긴 했다. 너무 준비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하게 된 결혼인 데다가, 언뜻언뜻 비치는 묘사로는 남편이 도무지 좋은 사람 같지도 않다.

"쇼코는 별로 돈이 안 들어서 좋다니까."

신혼 무렵에 딱 한 번 홋카이도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식당의 삿포로점에 갔었다. 오징어를 먹고 있는 쇼코의 귓가에 그가 그렇게 속삭였다.

p.51

좋은 이유가 돈이 안 들어서라니. 정말 너무하지 않아?

 

아무튼 그렇게 그리 평탄치 않은 삶을 사는 쇼코에게 낮술은 특별한 위안이 된다.

처음 책소개에서 쇼코의 직업을 '지킴이'라고 소개하는 걸 보고, 밤 동안에 환자나 노약자 옆을 지키는 간병인이나 요양보호사 같은 직업인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니 쇼코가 하는 일은 좀 더 독특하고, 어떻게 보면 소설이라 허용괴는 신기한 직업이었다. 말 그대로 홀로 있을 수 없는 사람들, 혹은 외로운 사람들의 옆을 지키고 있는 직업.

그 덕에 소설은 쇼코의 이야기이면서도 쇼코가 지키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군상극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플러스 점수가 되는 부분이었고.

어떻게 보면 일종의 성장소설이나 방황하는 어른의 길찾기에 대한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는 소설이다.

그렇게 쇼코가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맛있는 식사와 한 잔(혹은 여러 잔)의 술과 쇼코가 돌본 사람들, 사랑하는 딸, 그리고 무엇보다 쇼코가 힘들 때 늘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이다.

지금, 이 두 친구가 내 지킴이다.

p.268

책을 읽다보면 맛있는 식사에 술 한 잔을 곁들이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커진다. 

 

<낮술>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 잔의 기분좋은 낮술같은 책이다.

 

그리고 책에서 알게 된 또 한가지. '항상 가구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이나 찧길'과 막상막하일 정도로 쪼잔하고 생활밀착형이면서도 특히 이 시국에 더욱 무시무시한 저주가 있다.

이제 당신은 외식할 때마다 그 맛있는 음식 위에 반드시 누군가가 재채기를 할 거야. 내가 방금 저주를 걸었으니까.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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