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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올해의 책 2019
그냥 흐림이라고 대답하겠다

[도서] 그냥 흐림이라고 대답하겠다

배연수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시'는 때때로 온마음을 쏟아부어 투명해진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또 어쩐지 그냥 좋기도 하지만 특히 묘하게 끌리는, 매력적인 구절을 발견할 때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어쩜 이런 단어를, 문장을 생각해낼 수 있는지 신기하고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되뇌여본다. 읽으면 읽을수록 넘 대단하고 무척 멋지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시'가 가득 담긴 오묘한 빛깔이 매력적인, 흐림을 닮은 '보라빛'을 품은 근사한 시집을 만났다.

 

그냥 흐림이라고 대답하겠다

 

 

좋은 시가 아주 많았다. 만나는 순간 좋아질 수 밖에 없는 시들이다. 언젠가 읽은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에서 김연수 작가가 한 추천사에 그런 말이 나온다. 그녀의 시를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나만 좋아했으면, 싶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나 역시 그렇다. 나만 좋아했으면, 싶은 사람이랄까...? 헌데 그럼 안될 테다. 나 역시 널리 알리고픈 마음으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분의 시를 읽고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했으면...하고 바래본다. 그래서 다음 시, 또다른 시집으로 앞으로도 계속 만날 수 있음 좋겠다.

 

하나같이 다 좋아서 선뜻 고르기 힘들었지만 정말 빠져들어 감탄을 거듭한 시를 몇 편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빈 상자 (p14~15)


고양이가 와서 빈둥거리기 좋은 크기의
빈 상자가 하나 있습니다

 

우울한 기분을 따서 넣으면
짙은 보랏빛으로 안전하게 시들어갈 수 있는 깊이입니다

 

곁눈질만 하고 있는 내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모서리마다 확고했던 각이
슬며시 닳아져 버린 것을

 

당신은 알고 있나요?

 

늦은 저녁은 꼭 그만큼
아침을 당겨준다는 말

 

낡은 상자를 앞에 놓고
고양이를 기다립니다

 

만나자 마자 일생을 다 살아버릴
늙은 연인을 기다립니다


고양이가 와서 놀기 좋은 빈 상자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우울한 기분도 시들어 없애주는 그런 곳 말이다. 알듯 모를 듯한 이 시를 읽으며 가장 감탄한 구절은 '늦은 저녁은 꼭 그만큼 아침을 당겨준다는 말'이었다. 깜깜한 저녁처럼 우울하고 슬펐던 일이, 길어질수록 암울했던 일이 어느새 밝은 햇님이 떠올라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기쁨과 행복도 더 빨리 더 많이 찾아올 거라는 그런 의미를 지닌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보를 내는 사람 (p18)


당신과 내가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한다
내가 묻는다
뭘 낼 거지?

당신이 보를 낸다

 

스스로 갇힐 우물을 파고 있는 당신은
내 뾰족한 손을 위해
언제나 보를 낸다

 

이럴 때 왜 나는 기꺼이 바위를 내지 않는가

 

당신에게 빈 주먹을 맡긴 그날처럼 울지 않는가


나 역시 기꺼이 바위를 내진 못할 것 같다. 바위를 낸 것같은 지금도 내었지만 안 낸 것처럼 몹시 찝찝한 기분이기에... 시는 이처럼 나의 기분 역시 떠올려보게 만든다.

 


삼각형에 갇혀 울었다 (p28~29)


어쩌다가 색종이를 사선으로 자른 일이 탈이 되었다
정삼각형이 된 색종이는 접고 접어도 삼각의 모양을 벗어나지 못했다
삼각김밥은 둥근 김밥의 맛을 낼 수 없고
피아노를 아무리 두들겨보아도 트라이앵글 소리는 나지 않았다

 

작아진 삼각형 안에 내가 갇혀 있었다
모난 관계 안에 갇혀 있듯이
되지 않는 일 앞에서 참 많이도 눈물 흘렸다

 

세발자전거가 삼각 안에서 반짝거렸다
동생이 마루 끝에서 두 발을 엇갈리게 흔들며 울었던 오후,
아버지 들고 오신 자전거였다
자전거는 스텐 그릇처럼 반짝거렸지만
골목길 끝에서 세 개의 바퀴와 함께 사라졌다
그날 아버지와 동생은 트라이앵글 소리처럼 경쾌하게 멀어졌고
나는 물결처럼 흔들렸던 골목길을 잘라버렸다

 

아무리 접어도 모양을 바꿀 수 없었던 삼각형 안에서
나는 꼭짓점이 되지 못한 채
삼각형은 접어보았자 삼각형밖에 만들 수 없다는 사실만
곱씹으며
오랫동안 삼각형 안에 갇혀 울었다


왜 삼각형일까? 어째서 삼각형일까?...라는 물음과는 별개로 내 마음을 흔들었던 문장은 따로이 있었다. '되지도 않는 일 앞에서 참 많이도 눈물 흘렸다' 고집이 유난히 센 사람은 바로 그 고집 때문에, 마음을 다친다. 돌아가도, 잠시 쉬었다 가도 될 텐데 세게 부는 바람에, 휘몰아치는 태풍에 맞서다가 고스란히 비를 맞고서는 끙끙 앓는다. 삼각형 안에 갇히고 싶어 갇힌 것도 아닐 텐데 문이 빤히 보이는데도 헤어나올 수 없어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감정과 생각이 증폭되고 지나간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며 삼각형에 갇혀 울었다. 어쩌면 아직도.

 


등을 보다 (p43)


날아가는 잠자리 한 마리를 보았다
등이 붉다

 

내게 등을 보이며 걸어가던 사람이 있었다
그의 등이 그가 하지 못했던 말을 건네주며
멀어져 갔다

 

등은 바라보는 것보다
서로 기댈 때가 좋다

 

지금
단풍나무에 앉았다 떠난 잠자리는
모를 것이다

 

자신의 등이 붉다는 것을
등이 건네주는 이야기들을

 

와락...안아주고픈 기분이 드는 시랄까. '등은 바라보는 것보다 서로 기댈 때가 좋다' 이 구절은 예전에 우연히 발견하고 너무 좋아 눈을 떼지 못할 만큼 감탄을 했었는데 '시'였다니!!! 무척 넘 반갑고 기쁘고 좋다.

 


보름2 (p88~89)


팔월 더위에 뒤척이다 눈을 뜨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보름달

 

달아,
부르고 보니 핏줄 같은 기분이 든다

 

나를 안고 젖을 먹였을 엄마는
팔순이 넘어서도
딸에게 채근하시지

 

밥 먹어야지, 배고플라
귀찮아도 밥 먹고 가

 

지금 엄마랑 밥 먹고
들어오는 길이잖아요

 

밥은 기억 못해도
딸 얼굴은 잊지 못한 엄마

 

엄마의 몸 안에는 보름달 하나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달을 보며 불러보는
엄마,

 

바람아 불지 마라


아릿...해져오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며오는 시다. 엄마라는 단어가 지닌 힘은 참으로 크다. 그러면서도 그 강력한 힘에 자꾸만 반항하고픈 마음이 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 힘을 인정하고 순순히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전에 존중이 먼저겠지만.

 

 

눈치챘을까? 그렇다. 제목부터 '흐림'인 이 시엔 시집의 제목이 등장한다. 나는 보자마자 시집의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고 어딘가에 이 문장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역시 있었다. 흐림. 햇살 쨍한 맑음도, 주룩주룩 내리는 비의 중간 같은 구름으로 가득한 참으로 애매한 날씨, 흐림. 여전히 햇살이 좋은 나이지만 어느덧 아주 가끔은 흐림도 좋은 나이가 되었다.

 

 

 

***

 


진솔한 글은 수천마디의 말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친근하게 느껴지는 시와 함께 수많은 생각 사이를 천천히 걸어볼 수 있도록 꼬옥 만나보길... 금방 또 만나고 싶어질 테지만 행복한 기다림이 될 듯하다. 즐거이 곁에서 아름다운 풍경처럼 내내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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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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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를 내는 사람이 좋네요 저는. 패턴이 빤한 아내와의 가위바위보에서 늘 제가 이기는 것은 아내가 첫판에 늘 보를 내기 떄문입니다. 이 시를 읽은 오늘은 제가 가위 대신 바위를 내서 아내를 첫판부터 기분좋게 만들어줘야겠습니다.

    2019.12.17 14:08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키미스

      그러셨군요. ^^; 삶님~ 보를 내셨을까요? 앞으로도 보를 낼 일이 많으셨음 좋겠습니다. 분명 행복해하실 거여요. ^^ 좋은 말씀 넘 많이 감사드려요~*(__)(^^)*~ 추워지는 날씨에 건강조심하시구 남은 한 주도 즐겁게 잘 보내셔요~*>_<*~///

      2019.12.19 00:51
  • 파워블로그 찻잎향기

    빈 상자, 고양이, 삼각형... 이런 저런 단어들에게 세상을 향한 시선이 부드럽게 변해 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좋은 시, 따뜻한 리뷰 .. 참 좋습니다 .^^

    2019.12.17 14:29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키미스

      그치요? 정말 넘 마음에 쏘옥 드는 좋은 시와 시집이었어요. 다음 시집도 꼬옥 만나보고 싶답니다. ^^ 찻잎미경님~ 넘 고맙고 감사한 좋은 말씀, 늘 따뜻한 댓글 남겨주셔서 넘 많이 감사드려요~*(__)(^^)*~ 추워진 날씨에 건강조심하시고 남은 한 주도 행복하시길 바래요~*^^

      2019.12.19 00:53
  • 파워블로그 이수

    그렇죠? 이 시집이 첫번째 시집이니까 두번째 세번째 시집도 나오겠죠? ㅎㅎ 좋은 시들이 많다고 저도 생각해요.^^

    2019.12.17 16:25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키미스

      앗! 이수님이시닷~!!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나와야겠지만 백 번째까지 나오면 정말 넘 감사할 거여요. ㅎㅎ 이수님 덕분에 파란자전거님의 시를, 시집을 뵐 수 있어서 정말 넘 많이 감사드려요~*(__)(^^)(>.<)bbb*~/// 이수님~ 건강조심하시구 복 듬뿍 가득 받으시길요~*^0^

      2019.12.19 00:55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