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너무도 다행스럽다. 애린 왕자 오디오북을 듣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를 몇 해의 간격을 두고 몇 차례나 읽었었다. 물론 완독하지 못한 채 건너 뛴 날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다 올해 다시 읽은 어린 왕자는 지난 날의 감상과는 다른 깊이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나는 저자가 마련한 깊이 중 많은 부분을 헤아리지 못한 채 그저 읽어내려 간 것이구나 하는 걸 이 경상도 사투리 버전의 애린 왕자를 통해 알게 되었다.
경상도는 내게 고향보다도 더 긴 기간을 함께한 땅이다. 하지만 사투리를 흉내낸다고 해도 사투리의 속내까지 알아내기에는 아직도 괴리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런 폭과 깊이를 문학과 함께 하는 사투리로 대하니 깊이가 메워진 듯, 폭이 좁혀진 듯한 착각을 갖게 했다.
사투리로 듣는 애린 왕자는 그 어느 번역본으로 대하는 어린왕자 보다도 살가웠고 친밀했다. 구간구간에서 나는 활자로는 다가설 수 없던 인물들과 상황들의 이면에 가닿는 것만 같았다. 다만 애린 왕자가 지구를 떠나는 26장에서는 절제되던 문장들이 제재가 풀린 듯하고 감정이 과잉된 것 같은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번역되면서의 해이함이 아니라 저자 자신이 어린 왕자의 이 별과의 이별에 격앙된 정서로 적어내려 간 탓이라는 걸 알 것만 같았다.
그 어느 번역서 보다도 더 깊이 어린 왕자 속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살갑게 다가왔고 그 누구 하나 나의 내면에 있지 않은 인물은 없다고 느껴졌다. 그건 아마도 내가 심하게 어른이 된 탓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에만 의미를 두던 나였기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본서의 주제의식과는 달리 어린시절 보이는 것에 주목했더라면 나는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행간을 모두 아우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보이지 않는 것에만 의미를 두다가 뒤늦게 보이는 것들도 중요함을 깨우친 어리석음이 보이는 것들에만 주목하다 찾아드는 후회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걸 깨우치기도 했다.
활자로 대할 때 보다 더 깊은 감상이 들었다. 활자로 대하는 어린 왕자는 머리에 각성을 주었다면 음성으로 대하는 애린 왕자는 마음 깊이에서 울렸다. 역자 자신이 낭독을 했다는데 성우 출신인 것인지 연기자 출신이기라도 했던 것인지 너무도 감동을 주는 낭독이었다.
경상도 사투리 버전의 애린 왕자를 선택할 때 부터 계획한 것이지만 다시 한 번 전라도 사투리 버전 에린 왕자도 들어보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된다. 사투리로 듣는 어린 왕자에게서야 비로소 마음까지 와닿는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분들도 활자본보다는 낭독본을 선택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 이야기로 다가서는 깊이도 폭도 활자와는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