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사실 죠셉 켐벨의 [신의 가면] 시리즈 1권인 [원시신화]의 리뷰를 몇편으로 분할해 쓰려면서 서론으로 전제 삼을 작정으로 쓴 글을 추려서 따로 올리는 것입니다. 도입부가 다소 맘에 들지않는 신앙인분들께 앞서 양해를 구합니다-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이전-수행관련개념-에 이미 언급했던 해석들은 간략히 하겠습니다만 짚고는 가야 할 것은 같군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기 1:26]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지라. 창세기 2:07]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이 구절들에 대해 이야기 하기에 앞서 이전 글의 내용 중 인용부분과 이후 내용 전개를 위해 필요 부분을 옮깁니다.
<아리예 카플란의 [성경과 명상]에 의하면 생기生氣로 번역된 히브리어 Neshamah는 숨을 뜻하는 히브리어 Neshimah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생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Nefesh는 휴식을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 Nafash에서 온 것이라 한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의 혼'이자 숨이 불어넣어져 '살아있는 영혼'이 된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네페쉬의 어원인 어근이 나파쉬라는 것에서 의미를 확장하자면 그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상태는 '하나님의 영(숨)이 휴식'하고 있는 상태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즉, 창세기에서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구절들을 근거 삼자면 사람은 구조적으로 하나님의 부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숨이자 영이 물질차원의 껍데기 속에 잠시 휴식하고 있는 상태가 사람'이며 또한 '하나님 영의 부분인 것이 사람'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구조로서는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어 있는 하나님의 부분'이며 위상적으로는 '하나님을 담고 있는 상태'를 가르켜 사람이라 한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다차원적 구조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생물들을 창조하신 후 자신을 닮은 구조와 자신을 담은 상태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축복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물질 차원의 우주에 충만하라. 물질 차원의 우주를 정복하라. 고 하신 것입니다. 땅이 상징하는 것이 물질 차원의 우주 전체임은 이미 초반에 언급하였습니다.
간략히 스킵을 살짝 거치자면 이 이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단하나의 금기라는 깨어질 수 밖에 없을 유혹을 주셔서 원죄라 일컬어지는 과정을 거쳐 때때로 인간들이 저주라 해석도 하는 실락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죄이기만 하고 저주이기만 하였을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이후에야 즉, 하나님께서 주신 단하나의 금기를 깨고 난 이후에야 인간은 지혜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곤 실락을 거치고서야 자신과 만물에 대한 이해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는 중 갈등하고 충돌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긍정성과 부정성을 두루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때론 긍정성에 때론 부정성에 휩쓸리면서도 되도록이면 부정성은 잠재우고 긍정성을 키우며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모든 이해와 노력의 어우러짐이 인간이 건설한 제도와 문화 즉 문명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애초에 깨어질 수 밖에 없었을 유혹이라 해야 할 단 하나의 금기는 인간이 반드시 깨고말아야 할 과도기였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나서야 하나님께서는 이후 인간의 삶에서 인간이 겪게 될 가장 원초적인 과정과 결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며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물론 그 잉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성인이 되면 남녀 대다수가 다 알게 되는 사실입니다만)과 수고와 출산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3:16]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죄를 지었으니 판결을 내린다시며 하신 처벌이기만 할까요? 잉태의 고통이라 하셨지만 이 시대의 성인여성이라면 미혼이더라도 잉태에 이르는 과정에 결코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걸 다들 알지 않나요?
상상해 보세요. 커다란 빛의 행성 하나에 수억 수십억개의 혜성이 뛰어들다가 단하나의 혜성이 그 빛의 행성과 합일하는 것을... 그 빛의 행성이 둘로 넷으로 여덟으로 64개로 분열하면서 그 분열이 셀수없는 재분열을 거치고 있습니다. 그러다 제모습을 갖추며 성장해 가서는 생명체를 이루어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것(아기의 입장)이 산모의 입장에서 보면 잉태에서 출산에 이르는 과정이 아닙니까? (출산 이전까지의 상징은 난자에 정자가 결합하고 세포분열하는 것을 파동적 차원에서 그려보았습니다) 잉태하기까지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며 여성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이 잉태와 출산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를 소우주로서 작게 나마 모방해 실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저주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 후에 매번 보시기에 좋아하신 것처럼 우리 인류는 미술이던 음악이던 춤이던 연극이던 그외 다양한 예술로 창조 과정과 그를 감상하는 중에서 하나님께서 창조 이후 느끼셨다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마음을 비슷하게나마 느껴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구조로 지음받아 하나님을 담은 상태로 존재하며 이렇게 하나님을 닮아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성에게 하신 잉태, 수고, 출산이라는 전제가 이렇듯 저주 보다는 축복이였다면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말씀이라고 어찌 저주이겠습니까?-
이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표현이 이 시대 대다수 여성들에게 반감을 가져올지 모르겠으나 다스리다는 뜻의 히브리어 원어 '이르두'는 성경 히브리어 학자들에 의하면 문맥에 따라 '혹독한 훈련, 영향력, 통달하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르두'의 문맥상 쓰임에 따른 의미를 되짚고 보면 '혹독한 훈련을 거쳐 통달하게 되고 그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향력을 행사하리만큼 통달하기까지 혹독한 훈련에 뛰어들기 위해 무엇이 선행해야 하는걸까요? 특정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 열정이 그 대상에 뛰어들게 하고 그러한 관심과 애정과 열정이 지속될 때에야 비로소 부단한 노력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 않나요? 통달한다는 것은 혹독한 훈련이 끊임없이 이어져서야 이르는 것인데 이를 동양에서는 功 이라 합니다. 內功 外功 功夫 功力 등으로 나타나는 功 이란 것은 하나 같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얻는 결실과 결실을 이루어나가는 과정 자체를 이릅니다. 문자적으로 二 자를 위아래로 이은 것은 천상의 원리를 지상의 원리(제도와 과학과 사상 등으)로 구현해내는 것을 상징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 힘(力)쓰는 것이 즉 노력을 끊이지 않는 것이 공(工+力=功)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통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학 등의 학문적으로는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이 문자가 쓰이는 어휘들이 적용되는 모든 경우에 功 은 결실인 통달과 과정인 혹독한 훈련 모두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功을 이루기 위해 관심과 사랑과 열정이 전제된다고는 하였으나 때로는 살기 위해 생업에 종사하며 자신의 일에 달인이 되기도 합니다. 자의 보다는 타의로 하여 들어선 길에서 통달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한 관심도 사랑도 없이 더군다나 끊임없는 노력도 없이 무언가에 통달하는 경우가 과연 있을까요? 지긋지긋하다며 하는 일에서도 달인이 되려면 끊이지 않고 그 일에 전념하며 숙련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해 능률적이며 더 효율적으로 결과를 보이는 이들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랑까지는 몰라도 자신이 맡은 바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주의하고 몰입하니 당연히 전체적으로도 또 세밀하게도 맡은 바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맡은 바에 대해 이해하고 숙련되는 과정과 그 과정상에서 매순간 갱신되는 결과물이 功 입니다. 이것이 단지 생계를 위한 일임에도 그러하다면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생명에게 사람이 만물에게 이러한 다스림을 실천하려할 때는 사랑과 관심과 열정이 함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겁니다. 이상적으로만 살 수는 없는 거라지만 이상이란건 기대할만 한 것이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는데 많은 분들이 공감할거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과제를 기독교인이라면 따르며 살아고자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며 앞으로 거듭 갱신해 통달해야 할 과정 중 초반에 이룬 결실의 하나로 게놈프로젝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진작에 게놈프로젝트 연구의 성과가 있었다고 하니, 모든 생명의 유전적 결함을 치료하는 육신차원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주는 일이나 생명연장이라는 희망도 희망에서 그치지 않을 조건은 갖춘 것입니다.)
[...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을 사모하는 아내에게 사랑과 관심을 지닌 채 열정적으로 남편이 아내를 위해 살아갈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내를 이해하려 끊임없이 관심과 주의를 기울일 거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관심은 사랑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향해 행사해야 할 영향력이라 한다면 다름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한결 같이 아내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힘겨움 속에서 격려하고 때론 도덕적 영적 흔들림을 겪는 순간 마다 의지할 대상이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심정적 바탕을 일깨울 수 있을 대상, 이 사람을 위해서라도 흔들리지 말자는 내적 근거를 불러일으킬 자원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은 기대할만한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기대하고 추구하는 것이 마땅한 이상입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다스림은 남편이 아내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역시 남편에게로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스림은 나날이 서로를 알아가려는 관심과 서로가 서로의 아름다움과 부족함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에 매료될 수 있고 칭찬해 줄 수 있고 부족함을 메워주거나 스스로 채워가려는 의지가 일어나서 열의를 다하도록 힘이 되어줄 때 가능합니다. 이것은 상대를 감싸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자로 포용包容이라고도 하지만 순우리말로 '품는다'는 표현이 더 와닿을듯 합니다. 알을 품듯 서로를 품어 줄 때 서로는 알 속의 생명이 차츰 온전한 개체로서의 형체를 이루어가 제 생명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이려 끝내 알을 깨고나와 갇혀있던 자신을 너머 진정 아름다운 생명으로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이러한 역할을 해주어야 할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사랑 안에서 가능하며 그 사랑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 순우리말 '품는다'는 표현을 쓴 것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개역개정판 성경에서) 번역한 성경히브리어의 발음이 [베루아흐 엘로힘 메라헤페트 알페네 함마임](우리글 어순 입니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베루아흐 엘로힘]이 '하나님의 신' 으로 번역된 것인데 히브리어 '루아흐'는 '하나님의 영, 성령, 마음, 바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함마임'은 '물들' 즉 물을 뜻합니다만 복수형이더군요. 제가 우리말 '품는다'는 어휘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다음 등장하는 '운행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발음 '메라헤페트' 때문입니다. '메라헤페트'의 어근은 '라하프'라고 한다는데 의미가 '알을 품다, 움직이다, 날개 치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품어줄 때 사람 안에 쉬고 계신 하나님의 영은... 그러니까 (누구나의) 내 안에서 잠들어 계신 하나님께서는 빛으로 깨어나셔서 서로에게로 날아오르실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요한일서 4:16]에서의 말씀을 창세기2:07 에 비추어 보면 좋을듯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생기(Neshamah)는 하나님의 숨(Neshimah)과 영을 뜻하는 중의적 표현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숨)을 사람에게 불어넣으셔서 사람은 생령(Nefesh)이 된 바, 이는 하나님의 영(Neshamah,숨-Neshimah-)께서 사람의 내면에서 휴식(Nafash)하고 계신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요한일서 4:16의 말씀을 창세기2:07 말씀에 비추어 보면 사람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영께서 휴식하고 계신다는 이 해석을 다시 한번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서 사랑이 잠들어 계신다 또는 사람의 내면에서 사랑이 쉬고 계신다는 말씀인 겁니다. 이렇게 누구나의 안에서 쉬고 계신 사랑을 서로가 스스로 일깨우도록 지지하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서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 다시말해 사랑이 날개짓하려 나서도록 품어(히브리어 '라하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남편과 아내... 서로에게 서로일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다스림(부부에게 있어서는 사랑과 관심을 열정으로 지속하는 것.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고 두둔하고 옹호하고 지지하며 격려하는 이가 되어주는 것, 도덕적 의지를 바로 세울 내적 바탕이 기능할 자원이 되어주는 것)을 위한 전제 조건이리라 봅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이렇듯 결코 여성들이 자존심 상할 표현도 아니고 여성의 자긍심을 저버리도록 하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렇게 아담에게 하신 말씀 역시 결코 저주일 수만은 없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
※ 심각한 복문 중독자라 글을 쓰고 나서 다시 읽어 보면서도 복문인 것을 간과하고 맙니다ㅡㅜ
한번만 다시 읽어봐도 알만 할텐데 몇차례 읽고서야 교정하게 되네요... 그리고 부연 설명이 필요한 부분도 간과했었기에 추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