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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실 죠셉 켐벨의 [신의 가면] 시리즈 1권인 [원시신화]의 리뷰를 몇편으로 분할해 쓰려면서 서론으로 전제 삼을 작정으로 쓴 글을 추려서 따로 올리는 것입니다. 도입부가 다소 맘에 들지않는 신앙인분들께 앞서 양해를 구합니다-


"삶의 충만성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화의 깊이와 폭에 직접 비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화의 신화들은 ...중략... 삶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신화 속 상징들은 가장 깊은 동기 부여를 가져온다"

"신화가 자신의 특질을 무의식으로 부터 꺼낼 때 삶은 그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신화는 -따라서 문명은- 시적 초일상적 이미지이다. 모든 시가 그러한 것처럼, 신화는 깊은 차원에서 상상된 것이지만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주 피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신화에서 국지적인 배경을 보지만,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 

죠셉 켐벨은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고 삶의 동기와 방향을 부여하며 (아마도 신화적 이해를 통해) 삶이 흘러들어가야 할 대상을 신화라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신화가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무의 세계란 무엇일지 쉬이 가늠할 수 없지만 아마도 우리가 '이것이 실상이다' 라고 갖고 있는 삶과 세계, 우주에 대한 정의가 실체 없구나 깨닫는 바를 이르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정의가 의미없다는 의미에 대한 이해로 삶과 세계와 우주가 정체하지 않고 끝내 무한으로 영원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딛게 할 것이기에,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고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는 삶과 세계와 우주가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그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무한과 영원이라는 상징의 본모습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실 겁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으며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였으며 함께이며 함께일 것임에 대해 신화만이 아닌 뇌과학-[신은 왜 우리를 떠나지 않는가?]참고-까지 유전공학-[슈퍼내추럴]참고-까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죠셉켐벨이 말하는 그 무의 입구라는 것을 거쳐 이르러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며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하나님과 하나되는 과정입니다. 죠셉 켐벨은 삶의 충만성, 삶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하는 것으로 신화를 보았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죠셉 켐벨이 말하는 신화란 상징임과 동시에 지금까지의 역사이며 앞으로의 역사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지나온 그 역사와 그 가치와 의미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갈 역사의 이정표를 성경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프롤로그는 우리 개개인의 내면에서 휴식하고 계신 하나님을 깨워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프롤로그라면 전개의 도입부(프롤로그도 전개도 '어찌 예수님이 아니시냐?' 할 분들이 있을까봐 말씀드리는데 예수님께서는 전개상의 도입부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역사에 있어 주제이십니다)는 이스라엘을 지구 전체로 확장한 현재의 이스라엘을 태양계를 시작으로 우리은하를 너머 물질차원의 우주 전체로 확장해 그 물질차원 전체에 천국을 구현하는 것일 겁니다. -왜 물질차원의 우주 전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을 정복하라'의 땅에 해당하는지 천국을 구현하라는 건 (연상하기 쉽겠지만) 어떤 말씀을 근거한 것인지 이야기 해나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당연히 이 구절 부터 시작해야겠지요? 제가 히브리어를 아직 공부하지 못해 서균석 목사님의 [성경의 잣대] 라는 그 분 저서를 근거 삼자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에 대한 원어인 해당 히브리어를 한글로 직역하면 '에트 핫샤마임'은 '그 하늘들의 본체', '베에트 하아레쯔'는 '땅의 본체'라고 한다는군요. 서균석 목사님께서는 창세기를 1차적 해석이 아니라 영적 정신적 각성 과정을 이른다고 재해석하셨습니다. 그렇게 성경은 늘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고 접근해 의미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저 역시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중의적 재해석 이전에 1차적 전달하려는 의미가 성경 독해를 하며 최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할 대상이라 봅니다. 그러니 영적 정신적 차원의 관점 이전에 그저 단순한 시각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하늘들'이라고 하늘이 복수로 쓰인 것과 '땅'만 단수로 쓰인 것으로 보아 '하늘들'이라며 특별히 복수로 기록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 의식으로 바라보는 단순한 하늘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들'이 상징하는 공간 즉 우주가 여러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씀하는 겁니다. 상위차원의 우주가 여럿 존재하며 단계를 거쳐 물질차원의 우주-'베에트 하아레쯔', 곧 '땅'-에 이르렀다는 것을 설명하려 '하늘들'이라며 복수를 '땅'이라며 단수를 사용하신 걸 겁니다. 초끈이론에서도 차원은 다차원이며 우주는 중첩되어 존재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차원의 숫자가 5차원이니 11차원이니 몇십차원이니 초끈이론의 변형 이론들 마다 관점이 다르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태양계, 그를 품은 우리 은하 다시 그가 속한 우주 이 하나의 차원에서의 우주만이 전부가 아니라 11차원 이상의 우주가 존재함은 과학도 주장하는 바입니다. 허니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창세기 1장1절이 하나님께서 다차원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것임을 성경과 과학 서로가 상호 근거 삼을 수 있음은 분명합니다. 

기독교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을 유대교 전승의 카발라에서도 아인(無)에서 아인소프(無限)가 생겨났고 아인소프(無限)가 짐줌-스스로를 철수 내지는 수축(일종에 한정)하는 과정-이라는 과정을 통해 테이루(tehiru, 굳이 히브리어와는 상관도 없는 영문 알파벳으로 쓸 일은 아닙니다만^^;)라는 원시의 공간을 탄생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이 구속과 한계의 세계인 물질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최초의 한정(제한)짓는 과정 이후 아담카드몬(원형인)이 탄생하고 이 최초의 존재 그 자체의 귀와 코와 입을 통해 세피로트의 빛이 터져나오며 우주탄생할 시작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후 세피로트는 빛의 그릇 속에 담겨지며 아담카드몬의 눈에서 방출되는 빛을 수용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각각의 세피라가 조직적으로 구조를 이루는 과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단계적으로  첫번째 아질루트계(발출의 세계), 두번째 브리아계(창조계), 세번째 예트지라계(형성계), 네번째 아시야계(제작계, 행위계, 즉 물질계)를 형성했다는 것이 카발리스트들은 전승하는 상징체계입니다. 우리 인류가 살고 있는 곳이 유대 전승인 카발라가 상징하는 체계 중 바로 이 아시야계(제작계,행위계,물질계)인 물질 우주인 겁니다. 결국 현대 과학의 가설과도 같이 그 다차원 우주 중 하나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특히 여기서 다차원 우주 중에서 하위차원의 물질차원 우주를 성경에서 '땅'이라 일렀을 거라는 정의는 앞으로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중요하니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이전-수행관련개념-에 이미 언급했던 해석들은 간략히 하겠습니다만 짚고는 가야 할 것은 같군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기 1:26]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지라. 창세기 2:07]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이 구절들에 대해 이야기 하기에 앞서 이전 글의 내용 중 인용부분과 이후 내용 전개를 위해 필요 부분을 옮깁니다.  

<아리예 카플란의 [성경과 명상]에 의하면 생기生氣로 번역된 히브리어 Neshamah는 숨을 뜻하는 히브리어 Neshimah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생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Nefesh는 휴식을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 Nafash에서 온 것이라 한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의 혼'이자 숨이 불어넣어져 '살아있는 영혼'이 된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네페쉬의 어원인 어근이 나파쉬라는 것에서 의미를 확장하자면 그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상태는 '하나님의 영(숨)이 휴식'하고 있는 상태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즉, 창세기에서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구절들을 근거 삼자면 사람은 구조적으로 하나님의 부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숨이자 영이 물질차원의 껍데기 속에 잠시 휴식하고 있는 상태가 사람'이며 또한 '하나님 영의 부분인 것이 사람'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구조로서는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어 있는 하나님의 부분'이며 위상적으로는 '하나님을 담고 있는 상태'를 가르켜 사람이라 한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다차원적 구조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생물들을 창조하신 후 자신을 닮은 구조와 자신을 담은 상태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축복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물질 차원의 우주에 충만하라. 물질 차원의 우주를 정복하라. 고 하신 것입니다. 땅이 상징하는 것이 물질 차원의 우주 전체임은 이미 초반에 언급하였습니다. 


간략히 스킵을 살짝 거치자면 이 이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단하나의 금기라는 깨어질 수 밖에 없을 유혹을 주셔서 원죄라 일컬어지는 과정을 거쳐 때때로 인간들이 저주라 해석도 하는 실락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죄이기만 하고 저주이기만 하였을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이후에야 즉, 하나님께서 주신 단하나의 금기를 깨고 난 이후에야 인간은 지혜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곤 실락을 거치고서야 자신과 만물에 대한 이해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는 중 갈등하고 충돌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긍정성과 부정성을 두루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때론 긍정성에 때론 부정성에 휩쓸리면서도 되도록이면 부정성은 잠재우고 긍정성을 키우며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모든 이해와 노력의 어우러짐이 인간이 건설한 제도와 문화 즉 문명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애초에 깨어질 수 밖에 없었을 유혹이라 해야 할 단 하나의 금기는 인간이 반드시 깨고말아야 할 과도기였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나서야 하나님께서는 이후 인간의 삶에서 인간이 겪게 될 가장 원초적인 과정과 결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며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물론 그 잉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성인이 되면 남녀 대다수가 다 알게 되는 사실입니다만)과 수고와 출산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3:16]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죄를 지었으니 판결을 내린다시며 하신 처벌이기만 할까요? 잉태의 고통이라 하셨지만 이 시대의 성인여성이라면 미혼이더라도 잉태에 이르는 과정에 결코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걸 다들 알지 않나요? 


상상해 보세요. 커다란 빛의 행성 하나에 수억 수십억개의 혜성이 뛰어들다가 단하나의 혜성이 그 빛의 행성과 합일하는 것을... 그 빛의 행성이 둘로 넷으로 여덟으로 64개로 분열하면서 그 분열이 셀수없는 재분열을 거치고 있습니다. 그러다 제모습을 갖추며 성장해 가서는 생명체를 이루어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것(아기의 입장)이 산모의 입장에서 보면 잉태에서 출산에 이르는 과정이 아닙니까? (출산 이전까지의 상징은 난자에 정자가 결합하고 세포분열하는 것을 파동적 차원에서 그려보았습니다) 잉태하기까지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며 여성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이 잉태와 출산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를 소우주로서 작게 나마 모방해 실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저주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 후에 매번 보시기에 좋아하신 것처럼 우리 인류는 미술이던 음악이던 춤이던 연극이던 그외 다양한 예술로 창조 과정과 그를 감상하는 중에서 하나님께서 창조 이후 느끼셨다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마음을 비슷하게나마 느껴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구조로 지음받아 하나님을 담은 상태로 존재하며 이렇게 하나님을 닮아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성에게 하신 잉태, 수고, 출산이라는 전제가 이렇듯 저주 보다는 축복이였다면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말씀이라고 어찌 저주이겠습니까?-  


이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표현이 이 시대 대다수 여성들에게 반감을 가져올지 모르겠으나 다스리다는 뜻의 히브리어 원어 '이르두'는 성경 히브리어 학자들에 의하면 문맥에 따라 '혹독한 훈련, 영향력, 통달하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르두'의 문맥상 쓰임에 따른 의미를 되짚고 보면 '혹독한 훈련을 거쳐 통달하게 되고 그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향력을 행사하리만큼 통달하기까지 혹독한 훈련에 뛰어들기 위해 무엇이 선행해야 하는걸까요? 특정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 열정이 그 대상에 뛰어들게 하고 그러한 관심과 애정과 열정이 지속될 때에야 비로소 부단한 노력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 않나요? 통달한다는 것은 혹독한 훈련이 끊임없이 이어져서야 이르는 것인데 이를 동양에서는 功 이라 합니다. 內功 外功 功夫 功力 등으로 나타나는 功 이란 것은 하나 같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얻는 결실과 결실을 이루어나가는 과정 자체를 이릅니다. 문자적으로 二 자를 위아래로 이은 것은 천상의 원리를 지상의 원리(제도와 과학과 사상 등으)로 구현해내는 것을 상징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 힘(力)쓰는 것이 즉 노력을 끊이지 않는 것이 공(工+力=功)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통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학 등의 학문적으로는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이 문자가 쓰이는 어휘들이 적용되는 모든 경우에 功 은 결실인 통달과 과정인 혹독한 훈련 모두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功을 이루기 위해 관심과 사랑과 열정이 전제된다고는 하였으나 때로는 살기 위해 생업에 종사하며 자신의 일에 달인이 되기도 합니다. 자의 보다는 타의로 하여 들어선 길에서 통달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한 관심도 사랑도 없이 더군다나 끊임없는 노력도 없이 무언가에 통달하는 경우가 과연 있을까요? 지긋지긋하다며 하는 일에서도 달인이 되려면 끊이지 않고 그 일에 전념하며 숙련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해 능률적이며 더 효율적으로 결과를 보이는 이들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랑까지는 몰라도 자신이 맡은 바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주의하고 몰입하니 당연히 전체적으로도 또 세밀하게도 맡은 바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맡은 바에 대해 이해하고 숙련되는 과정과 그 과정상에서 매순간 갱신되는 결과물이 功 입니다. 이것이 단지 생계를 위한 일임에도 그러하다면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생명에게 사람이 만물에게 이러한 다스림을 실천하려할 때는 사랑과 관심과 열정이 함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겁니다. 이상적으로만 살 수는 없는 거라지만 이상이란건 기대할만 한 것이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는데 많은 분들이 공감할거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과제를 기독교인이라면 따르며 살아고자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며 앞으로 거듭 갱신해 통달해야 할 과정 중 초반에 이룬 결실의 하나로 게놈프로젝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진작에 게놈프로젝트 연구의 성과가 있었다고 하니, 모든 생명의 유전적 결함을 치료하는 육신차원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주는 일이나 생명연장이라는 희망도 희망에서 그치지 않을 조건은 갖춘 것입니다.)


[...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을 사모하는 아내에게 사랑과 관심을 지닌 채 열정적으로 남편이 아내를 위해 살아갈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내를 이해하려 끊임없이 관심과 주의를 기울일 거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관심은 사랑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향해 행사해야 할 영향력이라 한다면 다름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한결 같이 아내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힘겨움 속에서 격려하고 때론 도덕적 영적 흔들림을 겪는 순간 마다 의지할 대상이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심정적 바탕을 일깨울 수 있을 대상, 이 사람을 위해서라도 흔들리지 말자는 내적 근거를 불러일으킬 자원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은 기대할만한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기대하고 추구하는 것이 마땅한 이상입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다스림은 남편이 아내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역시 남편에게로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스림은 나날이 서로를 알아가려는 관심과 서로가 서로의 아름다움과 부족함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에 매료될 수 있고 칭찬해 줄 수 있고 부족함을 메워주거나 스스로 채워가려는 의지가 일어나서 열의를 다하도록 힘이 되어줄 때 가능합니다. 이것은 상대를 감싸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자로 포용包容이라고도 하지만 순우리말로 '품는다'는 표현이 더 와닿을듯 합니다. 알을 품듯 서로를 품어 줄 때 서로는 알 속의 생명이 차츰 온전한 개체로서의 형체를 이루어가 제 생명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이려 끝내 알을 깨고나와 갇혀있던 자신을 너머 진정 아름다운 생명으로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이러한 역할을 해주어야 할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사랑 안에서 가능하며 그 사랑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 순우리말 '품는다'는 표현을 쓴 것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개역개정판 성경에서) 번역한 성경히브리어의 발음이 [베루아흐 엘로힘 메라헤페트 알페네 함마임](우리글 어순 입니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베루아흐 엘로힘]이 '하나님의 신' 으로 번역된 것인데 히브리어 '루아흐'는 '하나님의 영, 성령, 마음, 바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함마임'은 '물들' 즉 물을 뜻합니다만 복수형이더군요. 제가 우리말 '품는다'는 어휘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다음 등장하는 '운행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발음 '메라헤페트' 때문입니다. '메라헤페트'의 어근은 '라하프'라고 한다는데 의미가 '알을 품다, 움직이다, 날개 치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품어줄 때 사람 안에 쉬고 계신 하나님의 영은... 그러니까 (누구나의) 내 안에서 잠들어 계신 하나님께서는 빛으로 깨어나셔서 서로에게로 날아오르실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요한일서 4:16]에서의 말씀을 창세기2:07 에 비추어 보면 좋을듯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생기(Neshamah)는 하나님의 숨(Neshimah)과 영을 뜻하는 중의적 표현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숨)을 사람에게 불어넣으셔서 사람은 생령(Nefesh)이 된 바, 이는 하나님의 영(Neshamah,숨-Neshimah-)께서 사람의 내면에서 휴식(Nafash)하고 계신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요한일서 4:16의 말씀을 창세기2:07 말씀에 비추어 보면 사람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영께서 휴식하고 계신다는 이 해석을 다시 한번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서 사랑이 잠들어 계신다 또는 사람의 내면에서 사랑이 쉬고 계신다는 말씀인 겁니다. 이렇게 누구나의 안에서 쉬고 계신 사랑을 서로가 스스로 일깨우도록 지지하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서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 다시말해 사랑이 날개짓하려 나서도록 품어(히브리어 '라하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남편과 아내... 서로에게 서로일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다스림(부부에게 있어서는 사랑과 관심을 열정으로 지속하는 것.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고 두둔하고 옹호하고 지지하며 격려하는 이가 되어주는 것, 도덕적 의지를 바로 세울 내적 바탕이 기능할 자원이 되어주는 것)을 위한 전제 조건이리라 봅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이렇듯 결코 여성들이 자존심 상할 표현도 아니고 여성의 자긍심을 저버리도록 하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렇게 아담에게 하신 말씀 역시 결코 저주일 수만은 없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


※ 심각한 복문 중독자라 글을 쓰고 나서 다시 읽어 보면서도 복문인 것을 간과하고 맙니다ㅡㅜ

한번만 다시 읽어봐도 알만 할텐데 몇차례 읽고서야 교정하게 되네요... 그리고 부연 설명이 필요한 부분도 간과했었기에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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