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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곡차곡

[도서] 차곡차곡

서선정 글그림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이 책은 반드시 종이책으로 만나셔야 합니다. 손으로 읽으셔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 손도 잘 씻고 구기지 않도록 넘기는 일도 오랜 버릇인데, 이 책의 표지에 손을 올리고 한참 있었습니다.

 

 

어릴 시절 시원한 젖은 모래 속에 손을 넣을 때처럼 기분이 좋아집니다. 표지에서 느껴지는 촉감도 세 종류나 됩니다.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눈을 감으면 더 잘 느껴질 듯합니다.

 

차곡차곡은 한 때 사고방식이기도 했고 행동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업무 기록조차 차곡차곡 정리해서 이게 다 역사! 하며 보관했거든요.

 

그래서 물건이 차곡차곡, 이라면 이제는 사양합니다. 매주 조금씩 정리하고 기증하는 일도 힘들어서 건너뛰고 싶거든요. 참 다행입니다. 이 책의 차곡차곡은 다른 것들이라,

 

 

봄입니다. 뒷산이 높고 앞개울이 가까운 이런 동네에서 살아 본 적이 없네요. 여름에 장마에 개울이 넘을 것 같아 염려증이 불쑥 거립니다.

 

모든 색들이 막 선명해지려는 듯 바쁜 계절, 봄은 작은 생명들이 비틀거리며 성장하는 계절이기도 하지요. 아직 완연한 봄 날씨가 아닌지 그림 속 동네 주민들 - 사람, 새, 물고기, 고양이 등등 모든 생명체들 - 이 살짝 숨어 있는 그림이 재밌습니다.

 

2021년은 제게는 3월쯤…… 부터 아주 세차고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매일 오늘 일자가 믿어지지 않아 맘속으론 조금 겁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간들이 차곡차곡 담긴 그림책이 적지 않은 위로가 됩니다. 뭐 했지? 싶은 내 시간들 역시 모든 모습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채워졌다 가겠구나…… 생각합니다.

 

책 속의 시간은 흐르는 계절들이 이어가는 장면들입니다. 봄에 태어난 생명들이 차곡차곡 자라고, 여름의 떠들썩한 풍경들 속 초록초록한 것들이 차곡차곡 신나고, 가을의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조용히 책 읽는 시간들이 차곡차곡 채워지고 눈과 바람이 섞여 나리는 퇴근길, 집으로 가는 길의 밤하늘은 적요함이 차곡차곡 번져 있습니다.

 

컬러링을 하는 분들의 작품을 보면 아주 섬세하고 판타지라 해도 어딘가 실재한다고 믿어지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일, 시급한 일, 꼭 해야 하는 일, 잊지 말아야할 일 등등 이런 순위로 매일을 해치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변도 작고 귀한 것들도 한참 바라볼 여유가 없어 거의 다 지나칩니다. 운이 좋아 기억이 나면 하늘 한 번 올려다보기. 그러니 굵직한 몇 가지를 빼곤 텅 빈 일상은 기억할 것이 많지 않아 빠르게 빠르게 지나가기만 합니다.

 

 

색감이 혼자 햇빛을 독차지 한 것처럼 선명하고 확실한데 어지러운 곳 없이 간결하고 담백하고 싱그러운 풀 향기가 나는 듯합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도화지에 그림을 한 가득 그리고 싶은 생각이 또 들었습니다 ― 기억하는 한 세 번째.

 

 

차곡차곡 떠올려 보는 일은 참 좋습니다. 기억 속 봄 햇살 한 모퉁이, 차가운 수박의 시원한 향기, 높고 파랗고 쨍한 가을볕에 바짝 달궈진 나무 향기, 가득 쌓인 낙엽들이 바삭바삭거리는 배가 막 고파지는 향기, 슬프지 않아도 코가 찡하게 상쾌한 겨울 아침 공기, 아주 아주 오래 전 화로 속 알밤 구워지던 향기, 모두 다 차곡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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