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와 언어가 어깨동무하다
<생각의 축제>를 읽고
"3,000만큼 사랑해!(I love you 3,000!)"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의 딸 모건 스타크가 잠자리에 들기 전 아빠에게 건넨 말이다. 어린 모건이 아는 숫자 중 가장 큰 숫자가 3,000이었기에 그만큼 아빠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또 한 아이는 "엄마를 얼마만큼 사랑해?"라는 물음에 "하늘, 땅만큼, 모래알만큼"이라고 답했다. 아이는 물론 어른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래알의 수를 헤아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사랑까지도 숫자로 나타내려고 애쓰는 게 바로 사람 아니던가.
어느날 엄마가 눈대중으로 나눠준 별사탕의 갯수 차이로 아이와 형은 싸움을 벌였다. 엄마가 눈물을 머금고 형제끼리는 셈하는 것이 아니라며 회초리를 내려칠 때마다 그 숫자를 세었다. 형제는 엄마의 화가 누그러지자 집 밖의 어둠 속으로 달렸다. 한참을 서성거리다 아이는 어디선가 들려오던 개구리 우는 소리는 누구도 셀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렸을 적부터 '세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인식을 가졌던 그 아이는 다름 아닌 이어령 선생이다. <생각의 축제>는 저자가 그때의 일을 '수의 비극'으로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숫자는 벌써부터 슬픈 현실을, 인간의 불모성을 잉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떠한 사물에도 숫자가 닿기만 하면 핏기가 사라져버린다. 병풍의 나비도 화단의 꽃들도 모두 없어지고 숫자의 기호만 남는다. 말하자면 사물을 셀 때 우리의 시선은 그것들의 모양이나 본질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21쪽)
앞서의 영화 『어벤져스』시리즈를 제작한 디즈니의 간판 스타는 누구일까? 유치원생인 우리 아이도 다 아는 미키마우스가 아닐까 싶은데, 갑자기 저자가 질문을 던진다. 미키마우스의 손가락은 몇 개인가? 처음에 5개였던 미키마우스의 손가락이 경제적, 과학적, 종교적 이유로 4개가 된 것도 흥미롭지만,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그 이야기 너머에 있다. 순서를 정하고 번호를 매기고 돈을 계산하는 일, 곧 수를 센다는 것의 의미와 그 수가 지닌 여러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근대 이후 수가 우리의 삶 속 깊숙이 자리하여 많은 것들을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개인은 숫자(로 대표되는 집단) 속에 매몰되어 그 개별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엄연한 존재를 누락 혹은 삭제하거나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61쪽)'하는 숫자의 세계에 대한 슈펭글러의 예언(이라 쓰고 '경고'라 읽는다)이 현실이 되지 않기 위해, 저자는 우리가 숫자의 언어성을 회복하고 각기 나눠진 숫자의 세계와 언어의 세계가 뒤섞여 서로 오갈 수 있는 길을 <생각의 축제>에 여러 갈래로 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언어라고 하는 것은 '정신' 그 자체다. 그런데 이게 쇠퇴하면 숫자들이 나와서 이 언어로 사색하는 개념을 전부 숫자화해서 이 세상은 완전히 숫자들이 판을 지배한다.(60쪽)
-오스발트 슈펭글러(독일 철학자), 『서구의 몰락』 중에서
저자에 따르면 '인생은 나를 빼앗아가려는 숫자와 나를 지키려는 언어와의 싸움(77쪽)'인 셈(미루어 가정할 때도 '셈'은 호시탐탐 언어의 자리를 엿보는 것일까)이다. 숫자의 세계 맞은 편에 있는 언어의 세계에서 미키마우스를 다시 한 번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손가락이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말이다. 대개 쥐는 이름으로 불리기보단 그 수를 세는 경우가 많은데, 이름 없는 쥐를 미키마우스라고 부르는 순간 숫자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이제 더이상 징그럽고 해로운 쥐가 아니라 전 세계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로서 고유한 역사와 소외된 사람들의 슬픔까지도 간직한 '미키'가 된 것이다.
숫자와 언어의 세계가 대립만 한다면 인생에서 마주하는 숫자의 의미를 온전히 읽어낼 수 없음을 일찍부터 깨달았던 문학가들이 두 세계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종종 보여왔다. 이를테면, 『1984』의 조지 오웰과 『아Q정전』의 루쉰 그리고 『1Q84』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숫자를 언어의 세계로 가져왔고, '광야의 시인' 이육사는 수인번호(264)를 이름으로 썼으며,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시인 이상은 『오감도』의 연작시를 통해 숫자가 주도하는 20세기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이처럼 하나된 두 세계는 우리가 보다 참신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생각, 곧 창조력(창의성)을 단련할 수 있는 운동장이 되어준다.
저기에 언덕이 있습니다.
셀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언덕에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은 셀 수 있습니다.
식탁에 사과 10개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7개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곱, 7을 가져올 수 있나요?
가져올 수 없습니다.
사과를 가져올 수는 있습니다.(220쪽)
-릴케의 시 중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우주의 달걀, 신비의 우로보로스(그리스어로 '꼬리를 삼키는 자'라는 뜻)인 '0'부터 완전한 조화나 우주적인 힘을 상징하는 '9'까지, 운동장에 놓인 허들을 하나씩 넘어가듯이 숫자마다 품고 있는 여러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수포자의 잃어버린 숫자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켜 세워 사방으로 뻗은 수사자의 갈퀴처럼 숫자에 대한 지식이 풍성해진 기분이 든다. 그 가운데 '1'은 "하나의 숫자라기보다 모든 숫자를 포함한 또 모든 숫자가 시작되는 근원점, 중심점(185쪽)"으로, 그 형태가 쭉 뻗어서 자립과 꼿꼿한 자질을 가졌기에 지배적이거나 통솔적인 힘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내 생각을 하나 보태어 숫자를 살며시 눕혀본다면, 그 수직성이 수평성으로 바뀌면서 평등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다. 또한 1 더하기 1 또는 1곱하기 1을 나타내는 기호('+', '×')로도 변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연대의 이미지로 발전시켜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책을 넘기면서 생각의 허들을 몇 개 넘었고 또 몇 개를 넘어뜨렸는지 세어보려는 나에게 저자가 그냥 허들을 다 넘은 '셈치고' 서평을 마무리 짓자며 마지막 수(數)신호를 보내오는 것만 같았다. 불합리하거나 답답한 일이 생기면 속는 셈치고, 받은 셈치고 등 '그런 셈치고'라는 말을 자주 쓰는 우리의 문화를 가르켜 '셈 문화'라고 명명한 그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치의 오차나 잠시의 여유도 없이 합리성과 기능성만을 추구하는 현대사회를 향해 비(반)합리주의가 아닌 합리주의를 넘어서는 '초합리주의'라는 발칙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그 주춧돌로 셈 문화를 괴어 놓자고 피력했다. 그렇다. 아니, 그런 셈이다. 생각의 축제는 끝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한 셈이다. <생각의 축제>는 숫자와 언어가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세계가 바로 다양하고 창조적인 생각이 넘치는 축제의 장임을 일깨워준다. 숫자와 언어 어느 한 세계에 치우치지 않도록 무시로 경계하며 둘 다 사랑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도 날마다 축제가 되리라 믿는다.
숫자에 매달리는 인생은 허무하기 마련이지요. 눈에 보이는 숫자를 넘어서 언어와 이름의 세계를 결합시켜야만 우리는 진정한 창조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중략) 결국 '8020 이어령 명강-생각의 축제'는 숫자(8020)와 고유명사(이어령), 보통명사(명강)가 혼합된, 숫자와 언어의 세계, 숫자의 삶과 언어의 사랑이 살아 숨 쉬는 '생각의 축제'입니다.(221쪽)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