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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도서] 작별

이어령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마지막 인사말에 심어둔 씨앗 하나
<작별>을 읽고


 


 


  당신과 '이별'한지도 반 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시처럼 당신은 떠났지만 나는 당신을 보내지 않은 기분이 듭니다. 여러 출판사들이 번갈아가며 펴내는 당신의 유고집들을 마주할 때가 특히 그러합니다. 내가 있는 세상에 여전히 당신도 함께 있는 것만 같아 슬프고도 기쁩니다. 이번에 <작별>을 읽고 나니 불현듯 당신과 헤어짐의 인사를 제대로 나누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본인이 없는 세상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그리고 멀지 않은 미래에 삶을 살아가게 될 이들에게 "잘 있으세요. 여러분 잘 있어요."라고 작별 인사를 건넵니다. 묘하게도 헤어짐과 단절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우리는 항상 연결되고 중요한 유산을 공유하게 될 것이라는 당신의 생각과 말에 기대어 어떤 연대감과 기대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살아생전에 당신이 남다른 발상과 통찰로 당신만의 생각과 말을 우리에게 전하고 그것들을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구현해낸 장본인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당신은 책속 마지막 인사말에다가 작고도 큰 생각의 씨앗을 심어 두고 동요 한 곡을 연신 부르면서 거기에 어떻게 물을 주고 흙을 고르면 좋을지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원숭이와 백두산. 우리에게 없었던 것과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가 백두산이 뭐고 원숭이는 뭐냐 얘기하면서 지난 100년을 이야기했듯, 내가 없는 세상의 100년을 살아갈 키워드 같은 노래가 내가 모르는 저 후손들의 입에서, 놀이터에서, 시골 마당에서 불릴 겁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가 어렸을 때 부른 것처럼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와 또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겁니다. 그게 뭘까 궁금하지 않나요?(122~123쪽)



  처음에는 내 귀를, 아니 두 눈을 의심하며 단순히 세대를 이어 어린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옛 노래가 왜 소환됐는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책장을 넘길수록 당신의 흥얼거림이 점점 흥겨워짐을 느끼게 되고, 나 또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개화기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자가 노랫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재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염원합니다. 이러한 경험을 밑거름 삼아 미래의 우리가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을 향유하며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기를 말입니다. 원숭이에서부터 백두산까지, 다시 누룽지·묵은지·우거지·콩비지·짠지 등 5G에서 뻗어나간 가지들에 관한 이야기를 신명나게 듣노라면 한평생 목마른 사람이 언제든 물을 길어 먹을 수 있도록 우물을 파며 살다간 당신에 대한 고마움이 일었습니다.
  당신과 이별이 아닌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서「작별」이라는 노래가 문득 떠오릅니다.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날 그날까지 이 세상 사람들과 당신이 나눠준 생각의 씨앗을 '잘' 돌보고 '잘' 키워내고 싶습니다. 디지로그 시대의 접속과 접촉, 생명자본 시대의 눈물 한 방울을 기억하겠습니다. 비록 당신이 없는 세상이지만 여기 남은 우리가 앞으로 부를 노래와 또 풀어나갈 이야기에 한결같이 관심으로 귀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잘 가세요, 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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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블로거 ne518


    “잘 가세요, 잘 있겠습니다”는 말이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잘 지내세요 가 더 좋을 텐데, 이젠 그런 말 못하는군요 흙속에저바람속에 님은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희선

    2022.08.17 03:30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이하라

    책장 한 칸이 이어령님에 대한 애정을 엿보게 하는 것만 같습니다. 사랑하는 분과의 작별이 애석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네요. 말씀처럼 다시 만나실 때까지 그분이 나눠주신 생각의 씨앗들을 잘 보고 잘 키워내면 그만한 이별과 재회의 선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건강하고 안녕하세요. 흙속에저바람속에님.

    2022.08.20 19:26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모나리자

    가을이 성큼 다가왔네요. 날씨도 좋구요. 그동안 많이 바쁘신 것 같아요.
    풍성하고 행복한 추석연휴 보내세요. 흙속에저바람속에님.^^

    2022.09.09 13:38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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