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
<아무튼, 사전>을 읽고
어떤 범위 안에서 쓰이는 낱말을 모아서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싣고 그 각각의 발음, 의미, 어원, 용법 따위를 해설한 책. 사전(事前)에 사전(辭典)에서 '사전'이라는 낱말의 사전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찾아보게 되었다. 아무튼 시리즈의 최신작이자 52번째 책이 사전을 주제로 한 까닭이다. 곧이어 책날개에 쓰여진 저자 소개를 읽고나서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 『밀크맨』, 『몬스터 콜스』, 『클라라와 태양』, 와 에세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었음에도 이 책들을 한 사람이 모두 옮겼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유의 여신상이 한 손에는 횃불을, 다른 한 손에는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는 것처럼 양손에 각각 펜과 사전을 들고 글을 옮기고 있는 번역가를 상상해보자. 이때 그에게 사전은 생필품인 동시에 어떤 의미로는 무기와도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저자인 홍한별 번역가에게는 필연적 혹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를 '사전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아무튼, 사전>을 펼쳐본다.
사전은 지금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더라도 앞으로 지식에 부족함을 느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책이다. 다시 말해 지금 무언가를 알기 위해 읽는 책이 아니라 앞으로 모를 것에 대비해 소장하는 책이다.
(17~18쪽, 「단어의 힘」 중에서)
저자는 어린 시절에 어떤 한 단어를 제대로 알지 못해 죽을 뻔한 경험을 털어놓는다. 그후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때에 제대로 하기 위해 그의 단어 수집욕도 커지게 된다.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머릿속에서 쉽게 꺼내 쓸 수 있는 단어의 수는 제한적이기에 "단어를 게걸스럽게 모아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어디에서 주웠는지는 모르나 언젠가 그 쓸모가 있으리라는 기대로 메모를 하거나, 특정 분야의 책을 옮길 때는 인터넷에서 찾은 단어들을 모두 합쳐서 자신만의 용어집을 만든다. 부족하나마 블로그에 글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나만의 단어장을 만들어 관리한다면 그때그때 인터넷 사전에서 애매한 낱말을 바로잡는 수고를 덜어주는 방법이 될 것 같다.
사전은 의미의 닻일 뿐이다. 닻줄을 얼마나 길게 늘이느냐에 따라 배는 꽤 멀리, 때로 위험스러운 곳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사전을 닻으로 삼아 최대한 멀리 뻗어나가야 한다. 단어의 새로운 쓰임을 만들어야 한다.
(29쪽, 「네 사전을 믿지 말라」 중에서)
어떤 언어와 다른 언어가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무슨 일이 생길까? 저자는 '사전 만들기'라고 답한다. 번역가는 이중언어 사전이라는 닻을 내려 서로 다른 언어로 말미암은 불통을 소통으로 연결하려 애쓰는 사람이 아닐까. 흥미롭게도 사전 속 단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사전 밖으로 나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반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어떻게든 붙들어서 고정하려는 사전의 이면을 재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사전뿐만 아니라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 어쩌면 시시포스의 후예일지도 모를 사전 편찬자들의 이야기에도 주목한다.
언어는 『1984』의 '신어(新語)'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어휘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당연히 점점 자라나야 하고 새로이 세포분열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 있는 언어다. 아무리 사전으로 옭아매려고 해도 우리가 쓰는 언어는 붙들어놓을 수가 없다.
(105쪽, 「새로 만들어지는 단어」 중에서)
먼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는 주인공 윈스턴의 직장동료로 사전 편찬자가 등장한다. 그는 영어, 곧 구어(購語)에서 기본 단어 하나만 남기고 의미가 겹치는 것들을 모두 없애는 일을 한다. 단어의 선택권이 줄어들면 사고의 폭도 좁아지고 그마늠 대중을 통제하기가 수훨해진다는 전체주의 논리와 함께 단어가 사전 속에 완벽히 갇히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짐작케 하는 설정이다. 다음으로 일본어사전 집필자 두 사람의 활동을 추적한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는 사전의 기능과 목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다. 정석처럼 객관성을 추구한 『산세이도 사전』과 집필자의 주관적 생각을 담은 『신메이카이 사전』이 세월이 흐르면서 판매량과 독자들의 반응이 역전되는 사건을 다룬다. 그동안 사전을 '찾는' 것으로만 여겨왔는데, 사전을 '읽는' 것도 가능함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사전의 '배'에 해당하는 부분을 비스듬히 기울지게 펼친 다음 쓰다듬어보라. 꽃종이처럼 얇은 종이가 촘촘히 겹쳐진 사전 옆면을 만지면 마치 고양이 이마를 만질 때처럼 만족스러운 느낌이 든다. 살살 긁으면 가르랑거리는 소리도 난다. 나처럼 고양이가 없는 사람도 "종일 키보드 근처에 드러누워 가르랑거리는" 사전은 키울 수 있다. 내 고양이의 이름은 '웹스터'이다.
(51쪽, 「사전은 고양이로소이다」 중에서)
또한 저자는 사전이 찾거나 읽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여러 방법으로 소개한다. 사전의 용례를 이어붙여 스토리를 만들고, 사전으로 스크래블(철자가 적힌 플라스틱 조각들로 글자 만들기를 하는 보드 게임의 일종)을 하거나 도서 암호(book cipher)를 만들어 즐길 수 있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사전을 반려묘로 둔갑시키는 마법과도 같은 묘사는 거듭 읽고 상상할수록 마음 한 편이 편안해지는 기분을 전해준다. 1990년대 초중고 시절까지만 해도 책가방에 하나씩 넣고 다니던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이 2000년대 이후 인터넷과 스마트폰 속으로 그 자리를 옮기면서 사전의 물성을 느껴본지도 오래되었는데, 고양이가 된 사전의 눈에는 이러한 모습들이 어떻게 비칠지 엉뚱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그렇게 사라진 외국어 사전들이 저자에게는 아버지를 추억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과거에 여러 외국어사전을 가까이하며 평생 지식욕을 추구하다가 뇌경색을 앓고부터는 그리스어사전을 찾아 읽으며 신의 목소리에 가까워지길 소망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현재 저자 곁에서 있는 외계어 사전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를 구사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이 살아갈 미래의 세상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언어'를 만나고 있다. 마음 안팎에 자기만의 사전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비단 저자만은 아닐 것이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나폴레옹의 말을 조금 비틀어보자면, 저마다의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수록되어 있겠지만 계속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체득한 삶의 지혜로 그 불가능마저 극복해내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이처럼 사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한 독자는 <아무튼, 사전>을 찾아, 아니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