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도서]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이규리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시는 결국 시 아닌 것을 제외한 나머지의 총합이다. 소리로 가득하였던 제외되었던 시간이 지나면 그제야 온전한 시간들이 나타난다. 홀연히 나타나는 잃어버린 제국처럼 안개를 뚫고 솟아오른다. 나는 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본다. 나를 향한 고백은 바람처럼 자연스러워 눈치 채지 못한다. 나의 중심을 두고 굳이 가장자리에서 자라고 있던 것은 꼬리, 를 뚝 떼어 뚝 바치고 싶어진다.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 아무렇지도 않게 / 몸이 몸을 버리지요 //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 <특별한 일> 중


  당신은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만 최선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라고 말해주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그들이 기르던 혹은 기약하던 사랑도 함께 떠났다. 남은 시간들은 계속 초라해지고 변복을 한 슬픔만 함께 웃고 있다. 세상은 더워진다는데 나는 서늘해져만 간다. 온기를 빼앗아가는 세상의 육식성은 그리움도, 서글픔도, 울음도, 미어짐도, 야윔도, 떠남도, 남겨짐도 모두 집어 삼킨다.


   달빛했으므로


  방 한 칸에 누운 다 큰 여식들 피해 아버지 자주 밖으로 나가셨지
  부풀어오른 공기, 펑퍼짐한 근친의 냄새를 피해
  아버지 나가셨지


  여학교 때 수학선생님
  교실만 들어오면 문부터 열어젖히셨지
  여자들에겐 도무지 인수분해되지 않는 게 있다고,


  열어야 할 문은 제; 안에 있어 아버진들 그리고 선생인들
  몸이 진저리치듯 하는 반복은 제 뜻이 아닌데


  여든 노모도 방에 들어서면 문부터 여신다
  미리 자신의 경계를 보아두는 걸까
  어머니 잠잠 월경(越境)하시나
  달빛하시나


  시 아닌 것을 제외하면 시가 되지만 남성을 제외한 자리에 여성만 남거나 여성을 제외한 자리에 남성만 남지는 않는다. 남성을 제외한 자리에는 남성이 없을 뿐이고, 여성을 제외한 자리에선 여성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곤욕스러운 배제가 사라진 자리에, 그제야 인간이 남는다. 시와 시 아닌 것들이 합쳐져야 쓰는 것과 보는 것이 자연스럽듯 그제야 남겨진 인간들이 무엇이든 배우고 가르칠 수 있게 된다.


  “무성한 음모를 밀고 나니 남자가 떠났다는 선배는 / 자신의 머리를 밀었다 / 생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밀었다 / 삭발한 머리에서 새순이 나올 때의 촉감은 / 까칠한 갈등이었다는데 / 먹옷 안에 자신의 풀밭을 감추어두자면 얼마나 따가웠을까” - <저 푸른 초원> 중


  시는 시인의 재현이면서 시간의 현현이다. 시간은 공간을 지배하고 공간은 풍경의 끄나풀이다. 멀찍이 비가 온다는 소식에 미리 온몸이 습해지는 것은 습관화된 불안 때문이다. 불안에는 뼈를 향해 스며드는 촉수가 달려 있고, 시인은 온 생을 다하여 그것을 피하고자 애쓰지만, 결국은 실패하여 시가 된다. 불안은 결국 시인의 몸이 되고, 시인의 몸은 조각나면서 피어나고, 우리를 향하여 촉수를 뻗는다.  


   불안도 꽃


  누가 알고 있었을까
  불안이 꽃을 피운다는 걸


  처음으로 붉은 피 가랑이에 흐를 때
  조마조마 자리마다 
  꽃이 피었던 걸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몸이 마르고
  밤마다 어둠을 고쳐 보는 동안
  불안은 피고 있었네


  불안은 불안을 이해했을까
  그 속에 오래 있으면 
  때때로 고요에 닿는다는 걸
  그건 허공이니까
  두드리면 북소리 나는 공명통이니까


  불안으로 불안을 넘기도 하는 것처럼
  꽃은 그것을 알아보았고 그것은 꽃을 도왔으니


  수많은 당신이 불안이었던 걸
  이제 말해도 될까


  흔들리면서
  일어나면서


  불안도 꽃인 것을


  시와 시 아닌 것으로 이루어진 세상과, 나는 관계를 맺는다. 나는 아무 상관도 하지 않는 것으로 관계 맺기를 좋아한다. 나는 관계를 맺기 전에도 후에도, 꼼짝도 하지 않는 관계를 좋아한다. 나는 관계의 진위를 파악하려 애쓰며 보내는 시간을 싫어한다. 내가 보내는 시선과 나를 향하는 시선을 모두 싫어한다. 느릿하고 매캐한 것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나는 시와 시 아닌 것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이규리 /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 문학동네 / 116쪽 / 2014 (2014)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