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도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원하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시작이 어렵지,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시작만 어려울 뿐, 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된다. 시작은 어렵지, 라고 사람들이 말한다면 보다 다양한 전개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도 어렵다, 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시작 다음부터는 괜찮아, 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시작도 어렵지, 라고 사람들이 말한다면 시작만 어려운 것은 아니다, 라는 의미로 직진하면 된다.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중


  제주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을 종종 보았고, 제주에 사는 선배 부부의 사는 모양을 살피곤 한다. 얼마 전까지 동네 사람이었던 이의 인스타그램에 떡하니 제주 집에서의 생활이 올라와서 놀란다. 동생의 후배였던 작가는 개랑 고양이와 함께 한동안 제주살이를 하였던 것 같다. 아내의 긴 휴가가 있어 제주에서 얼마간 있어볼 작정을 한 것이 작년이었다. 코로나는 물러날 기미가 없고, 아직 우리는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불빛 아래서 / 마음이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뒤졌는데 / 단어는 없고 문장은 없고 /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삶만 있었어요 // 한 삼 개월 / 실눈만 뜨고 살 테니 // 보여주지 못하는 / 이것 / 그가 채갔으면 좋겠어요” - <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다녀왔다> 중


  내리는 봄비는 간절해 보인다. 휴일 저녁은 미세하게 떨린다. 어느 순간에는 과거보다 미래가 그립다. 산등성이로 해가 넘어가고 있고, 다리 네 개가 모두 성한 의자의 다리 두 개를 허공에 띄운 채, 나는 상체를 벽에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떠 시간을 피하며 옆자리를 바라본다.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고 미소를 짓는 것도 아니고 찡그리는 것도 아니고 소리 내는 것도 아니고 침묵하는 것도 아닌 나를 짐작한다.  


  “봄에 태어났으니 봄에만 살면 좋을 것 같아서 / 일 년 내내 꽃이 핀다는 섬으로 이사를 갔다 / 바다 한가운데 놓인 화분 같은 섬이었다” - <필 꽃 핀 꽃 진 꽃> 중

  
  형체가 없는 것들은 서럽다. 모질지 못하다. 성실하게 비가 내린 날이다. 참담한 발설들이 차에 실려 거리를 떠도는 것을 목격했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형체를 가진 것들은 모질다. 그리움을 따라 윤곽을 그리면 형체가 갖추어질까. 눈대중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꿈결처럼 살다보니 표정이 실종되었다. 내 표정이 가리키던 형상들도 따라서 스러졌다. 몰락조차 구체적이지 않아 희미하게 이러고 있다.

  
   나비라서 다행이에요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


  내 할아버지가 맞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광대 근처에, 낯선 구멍 하나


  어쩌다 눈이 세 개가 되셨냐고 물으니
  내가 보고 싶어 그러셨단다


  아프지 않으셨냐고 물으니
  나비가 앉았다 날아간 정도라며 웃으신다


  내가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 듯해
  침만 삼키고 있으니

 
  까닭을 알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한동안의 결핍을 채워주던 색들이 이 비에 떨어져 씻길까 걱정한다. 순서에 맞춰 움트고 꽃 피우던 것들이다. 그 자연스러운 정연함이 경이로워 많은 이들이 그 주변에서 두리번거렸다. 우리는 모두 소란스러운 목격자였다. 모든 인공의 사물들은 스스로의 엉성함을 이미 자백하였다. 허락받은 참관자가 되어 한 생을 살아 내는 중이다. 현재는 뒤돌아본 미래이고, 나는 우두커니 멈춰있다, 다시 봄이므로. 


이원하 /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문학동네 / 160쪽 / 2020 (2020)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