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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도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이문재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열흘간의 외유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고양이 들녘과 고양이 들풀은 이리로 저리로 우리를 피했다. 하지만 고양이의 마음은 곧, 피하려 하여도 피할 수 없을 즈음이 되어버려서 우리의 품으로 이어, 져버렸다. 열흘이라는 긴 공백을 채우는 데 필요한 것은 겨우 두 시간 정도였다. 도대체 오래 가지 못하는 앙다문 외면을 보여줌으로써 고양이의 자존심을 잠시 고양시켰을 따름이다. 

  
   새

  
  먹이를 하늘에서 구하는 새는 없다
  아무리 날아도 하늘이 넓은 것은 아니다
  두어 뼘 날개가 작고
  눈이 너무 작을 뿐이다
  새가 먹이를 공중에서 구할 수 있다면 발은
  도대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둥지의 뿌리를 땅속에 박고
  공기의 계단에서 녹스는 날갯짓으로
  새는 결코 하늘에서 하늘을 염려하지 않는다
  새의 날개도 결국은 마른땅에서 썩는다

  그러나 우리 고양이가 없는 곳에서 우리는 더욱 고양이를 생각하며 지냈다. 서핑을 배우러 들른 갯마을의 슈트 창고에는 어미 고양이와 세 마리 새끼 고양이가 있었다. 제주도의 선배에게서 날아온 어미 고양이의 죽음이라는 비보에 마음을 아파했고, 사라졌던 새끼 고양이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식에 크게 안도했다. 주문진의 한 골목길에서는 작은 창고 지붕에 먼저 오른 형제를 향해 야속하다 우는 새끼 고양이를 향해 작은 응원을 보냈다.

   다시 황혼병


  누추한 자신의
  그림자를 어둠에 슬그머니 넘겨주는 습관
  나의 서쪽과 사람의 서편은 늘 빗나가 있고
  흥건한 노을, 놀빛
  하루는 그렇게 타버려야
  어두워지나보다 그런 순간이면
  슬그머니 부끄러워진다
  나와 사람의 간격이 칠흑처럼 보이지 않을 때
  슬그머니 지나온 하룻길이 어처구니없어져서
  죽은 피 뽑아버린 만큼 술을 퍼마신다
  술을 마신 만큼 캄캄해진다
  그림자 있던 자리가 쑤셔온다


  이번 여행은 함께 늙어가는 부부가 서로를 향하여 보내는 작은 응원에 다름 아니었다. 칠백여 미터 산 중턱의 임도에 난 풀에 발목을 쓸려가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을 때도, 힘겹게 기어를 바꿔가며 동해안 바닷길을 자전거로 오르고 또 이어지는 비탈을 브레이크 잡으며 내려올 때도, 심지어 몰려오고 또 몰려가는 해무에 휩싸인 이십층의 인피니티 풀에서 보이지 않는 검은 바다를 향하여 물끄러미 시선을 보낼 때도, 우리는 결국 서로를 응원하고 있었다.


   길


  어떻게 해야 죽음에게 잘 보일 수 있을까
  링거 주사약보다 천천히 아침은 내려온다
  툭
  바람의 안깃에다 딱딱해진 씨앗을 버리는
  저 꽃들은 얼마나 단정한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은 이들에게 잘 보일 수 있을까
  봉합사로 묶어둔 스물세 살
  내가 제일 무섭다


  보이지 않는 바다에는 우리가 낮동안 힘겹게 오르려고 했던 파도가 있었고, 이르게 해수욕장을 방문한 이들이 터뜨리는 폭죽 소리도 있었다. 기대지 말라는 발코니 난간에 자꾸 매달리는 철부지 아내를 보며 가슴이 철렁하였다는 이야기에 동생의 아내는 나이 들면 높은 곳이 무서워지는 법이라고 담담히 대꾸해주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는 에어컨을 끄지 못하게 했는데, 아내와 동갑인 경포 사는 형수는 갱년기를 이야기 했었다.


   길에 관한 독서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버리던 사랑을
  이름 부르면 입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삶의 속도를 내 의지에 따라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내 마음의 여부에 따라 삶의 속도를 좌지우지 하였다고 여길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와 나는 강릉으로 가는 길에 영국의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의 생애를 소개하는 세 시간 반짜리 팟 캐스트를 들었다. 오년 후 아내는 이십년 근속으로 삼주의 휴가를 얻게 된다. 그때는 아인슈타인의 생애를 들으며 이동하게 될지 모른다. 여덟 시간짜리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여섯 시간이고, 에디슨이 여덟 시간이던가, 아무튼...

 

이문재 /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 문학동네 / 137쪽 / 2021 (200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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