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나의 시간은 점조직으로 움직인다. 나의 시간과 시간 사이의 인과 관계가 느닷없이 희미해져서 어찌할 바 모르기 일쑤이다. 나는 붙잡을 수 없는 시간들, 나의 손아귀를 유령처럼 빠져나가는 시간들, 나의 뒤통수를 치는 시간들, 나를 향하여 길게 혀를 빼물어 조롱하는 시간들, 의 뒤에 서있다. 나는 좀처럼 (나의 시간임에도, 나의) 시간들과 마주하지 못한다. 나의 시간들은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집들이
우리 집에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 집에 온 사람들은 모두 창문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 지붕에 걸려 있는 구름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나는 커피를 내리고 슬리퍼를 신겨주지만 우리 집에 오는 불꽃 같은 사람들은 목조 주택을 태우고 구름 속에 연기처럼 섞여 들고 싶어 한다. 우리 집 안에는 죽음보다 따뜻한 향기가 있어. 나는 재만 남은 슬리퍼를 신발장에 보관한다. 모든 것이 부스러져 밑으로 떨어진다. 구름 안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나는 창문을 열어둔다. 바닥에 앉아 귀를 대본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우리 집에 온 적이 없는데. 불에 타고 남은 흔적을 모으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창문 밖으로 퍼져나가는 재의 향기. 누군가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다. 왜 밖에 서 있을까. 나는 무형의 차를 데우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슬리퍼를 현관 앞에 놓아둔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의 점액질을 손으로 문지른다. 어느 때 시간은 소용돌이치는 달팽이처럼 공포스럽다. 내 손가락이 저기를 가리킨다. 어둡고 차가운 시간이 저기로 기어갔다. 손가락이 내는 소리를 희미하게 따라간다. 멈추지 않고 계속 걷다보면 어둠조차 뚜렷해진다. 어둠은 시간의 뒤통수를 닮았다. 견고한 침묵으로 깎아지른 듯한 거기를 바라본다. 뚜렷해도 가까워지지 않는 어둠을 향해 손을 뻗는다, 물컹.
잔업
시간이 곡선으로 휘어지기 시작한 때부터 시간은 정지했다. 나는 무엇을 먹어야 할지 몰라 진흙에 얼굴을 묻었다. 이 그릇은 빽빽하다. 천사들이 흘리고 간 것이라는데, 남자였고 여자였던 시간이 담겨 있었다. 나는 무릎밖에 없는 짐승처럼 안으로 기어갔다. 돌아올 수가 없었다. 매일 출근하고 길에서 사라지는 노동자들. 시간이란 영원 중에서 가장 뒤에 처진 채 달려가는 부분이라는 문헌을 읽고 토했다. 곡선으로 휘어진 후 가닿을 곳이란 정지해버린 하루 안쪽인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창문 밖에서 천사들이 날개를 깎아내고 있었다. 일하기에 거추장스러워. 자꾸만 날아오르려는 힘 때문에. 깃털들이 눈처럼 흩어졌다. 앙상한 어깨를 창틀에 기댄 채 노래를 불렀다. 가장 영혼다운 부분은 인간이 아닌 부분이지. 세상을 닮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탕비실에서 냄비가 펄펄 끓고 있었다.
아름다운 기질을 가진 곡선의 다리를 건넌다. 시간이 기어간 자리를 뚜벅뚜벅 다리에 새긴다. 한 번 걸어본 다리는 보행의 기억을 쉽사리 잊지 못한다. 이런 기억들은 시간과 무관하다. 몸이 체득한 것은 마음이 체득한 것과 기질이 다르다. 마음이 체득한 것은 때때로 길을 잃어 나를 배신한다. 몸이 체득한 것은 때때로 나를 떠나 있지만 언젠가 나에게로 돌아온다.
“우리가 우리를 인간이라고 말하기에 너무 처참한 것은 / 인간을 낳고 자꾸 낳아서 / 눈부신 멸망을 찾아가기 때문일까요” - <휴일> 중
나의 시간은 나의 마음이 낳았다. 나의 시간은 나의 마음과 우애가 깊었다. 누이이자 어미인 마음은 언제나 시간의 알리바이를 다르게 알려준다. 나는 나의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지 못한다. 나는 나의 다리가 이끄는 방향을 좋아한다. 우리는 소곤거리며 함께 걷는다. 새벽에 들었던 소리를 저녁에 또 듣는다. 아침의 입술에 비하여 저녁의 입술은 더욱 붉다. 시작과 끝은 변함없이 변하고 있다.
연대
어둠이 쏟아지는 의자에 앉아 있다. 흙 속에 발을 넣었다. 따뜻한 이삭. 이삭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다. 나는 망가진 마음들을 조립하느라 자라지 못하고 밑으로만 떨어지는 밀알. 옆에 앉아 있다. 어둠을 나누고 있다.
시간에 대한 소문이 들려온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시간은 누적될수록 초라해질 것이고, 나는 그만큼 초조해지지 않기로 한다. 애도의 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그러하므로 시간은 아직 혈기왕성하리라 짐작한다. 나는 그저 차곡차곡 추적할 것인데, 그러다 문득 시간과 마주친다고 해도 크게 놀라지 않을 작정이다. 우리가 서로를 모른 척 하지 않을 때 드디어 우리는 사이좋게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영주 /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 문학과지성사 / 141쪽 / 2019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