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가을은 절명 직전이다. 여름은 기억조차 흐릿하다. 여름에도 내렸던 비가 가을에도 내리고 있다. 가을에 내리기 시작한 비가 겨울에 떨어져 내릴는지도 모른다. 오늘 집을 나가면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에 익숙해진지 오래다. 오늘도 오늘 집을 나갔고 오늘 집으로 돌아왔다. 집을 나갈 때 눈여겨보았던 집이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그대로이다.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의아한 삶을 살았던 적이 있다.
“출근하는데 죽은 매미가 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 <화무십일홍> 중
아직 숨을 거두지 못한 붉은 단풍잎을 오래 바라보고 돌아왔다. 이미 바닥에 떨어져 떨어지고도 지쳐 바스러지는 중인 잎들에게서 눈 돌렸다. 떨어진 이파리들이 뚫어 놓은 길을 따라 햇살은 덜어지고, 영장류들이 그 길을 밟고 또 밟으며 지나갔다. 삶의 무게를 벗어 놓으려고 그 길을 걷고 또 걸으면서, 그 길에 고스란히 무게를 버리고 또 내려놓으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시간의 갈피
시간과 시간 사이에 난 길
새벽 다섯시와 여섯시 사이의 샛길
오전 열시와 열한시 사이의 섬
오후 두시와 세시가 만나는
눈부신 여울목
저녁 여섯시에서 일곱시로 가는 길에
서 있는 우두커니와 물끄러미
그 시간이 되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울음
혼자서만 너무 그리워했던 눈빛
억장이 무너져 쌓인 적막
꽃들의 그림자와 떠나지 못한 햇빛들
이쪽으로 올 수도 없고
저쪽으로 가지도 않으며
현재와 과거와 미래 사이를 서성이는 응어리
그 시간의 갈피에 숨어 살고 있는 것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다함없이
이런 하늘을 곰탕이라고 한다네요, 아내가 말했다. 초미세먼지 매우 나쁨인 연이틀, 불구하고 그 하늘조차 눈 맞추겠다고 집을 나섰다. 눈 돌리는 곳마다 곰탕처럼 뽀얗게 우려진 하늘이었다. 인간들이 집을 비운 사이에 두 마리 고양이는 내내 잠을 잤을 것이다. 돌아와 눈을 마주치면 고양이는 아직 말갛게 돌아오지 못한 눈동자로 우리를 반긴다. 그럴 때 나는 고양이는 진국처럼 깊숙하게 안아 준다.
서피랑의 달
저녁이면 뒷짐을 지고
아흔아홉 계단을 올라가는 달
거제에서 나무해오며 살던
팔십서이 할매 지게에 얹혀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는 서피랑
나비가 지게 맨 꼭대기에 앉아
가만가만 뱃고동 소리를 듣는다
소란스러운 세상이 자꾸 더 싫어지는 중이다. 뉴스를 보면 자꾸 미움이 많아지는데, 나는 오래전 어떤 후배에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에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소용된다, 게다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 쓴 에너지는 최소한 그만한 에너지로 돌려받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에 쓴 에너지는 전혀 보상받지 못한 채로 낭비될 뿐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언덕에서 중얼거리며 아지랑이가 걸어나온다 / 땅속에 잠든 그 누군가 읽는 사연인가 / 그 문장을 읽는 들판 / 버려진 풀잎 사이에서 나비가 태어나고 있었다 / 하늘 허공 한쪽이 스르륵 풀섶으로 쓰러져내렸다 / 주르륵 눈물이 났다 / 내가 이 세상에 왔음을 와락이라고 불렀다” - <삶을 문득이라고 불렀다> 중
예전에 나는 ‘문득’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불현듯, 이라는 부사를 앞에 붙인 문장을 만들어내곤 했다. 나는 예외적인 삶을 꿈꾸었지만 어느 때 이후 그만두었다. 그것이 언제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예외적인 삶을 꿈꾸었던 때로부터 아주 잘 깨어났나보다. 하지만 문득 그 꿈의 여운이 되살아난다. 나는 시를 읽는데, 내가 시를 읽어서 꿈의 여운이 되살아난 것인지 아니면 꿈의 여운이 되살아나 시를 읽은 것인지...
권대웅 /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 문학동네 / 103쪽 / 20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