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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하양으로

[도서] 커다란 하양으로

강정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혁명이 아니라 혁신의 길로, 개혁조차 미루고 개선의 길로 나아가도 시간은 흘러간다. 이제 시간을 헤아리지조차 않는다. 나는 시간에 관심이 없다.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한다. 멀어지려고 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공간에 집착한다. 나는 멀리 나아가려고 하고, 나아가다가 멈추려고 하고, 멈추고도 의식하지 않으려 하고, 그러다가 다시 나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출발한 곳을 모르는 데 도착한 곳을 짐작할 수 있을까.


  ”뭐라 시를 써도 결국 모든 시간의 반대 얼굴일 것 / 그이의 진심 따윈 관심 없고 / 내 거짓의 진짜를 줄곧 물어뜯는 // 나는 지금 죽어도 좋다“ - <오 초의 장식> 중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는다. 저기 고양이가 절벽 아래로 날아오른다. 아니 추락한다. 그 너머를 보지 않기 위하여 절벽 끄트머리로 나아가지 않는다. 내가 머무는 안전지대의 색은 푸르다. 흑백의 절벅 너머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려오지 않는다. 길을 잃은 청각이 투항한 자리로 눈부신 하늘이 내려온다. 야곱의 사다리 같은 것, 저기 고앙이 한 마리 서둘러 뛰어오른다, 어디까지나...


  ”저승의 빨래인 양 펄럭이며 / 해의 날개로 뚫어 낸 하늘이 / 바다 가운데 황금빛 길을 낼 때, // 한겨울인데도 나비가 난다 / 태양의 눈귀엔 / 이 섬도 결국 죽음의 밀알 같은 토씨이었던 것“ - <한겨울, 바다의 분진> 중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성질도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제적 인간들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 나는 바다로 떠나고 싶던데, 도시의 구석구석에서는 지금도 무단 횡단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길 건너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 그 장면을 목격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맡긴 왼짝 신발이 환각통을 느끼고, 나는 우두커니 나의 정체성이 그라인더로 갈리는 장면을 바라본다. 


  ”죽은 자의 오늘로 아랫배 끌어올려 / 허공을 버팅기는 소리 // 산 자의 과거로 / 뒷목에 잠긴 빛을 구름까지 뒤섞는 몸 안의 천지 // 풀과 짐승이 사람 내장 속에서 / 더 먼 뿌리를 발바닥 아래 퍼뜨리고 / 몸 아래위 구멍들이 애초부터 스스로 텅 비었음을 밝혀 / 하늘의 통로로 접붙네“ - <살의 파도 ? 박병천 ’살풀이‘ 모창> 중


  서툴러도 멈추지 못한다. 멈추려고 해본 적 없다. 수거를 기다리지 않고 분별하려고 하지 않는다. 감량의 책임은 살에게 있는 것이지 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해본 적이 있다. 되도록 그 무엇도 제안하지 않는다. 준비된 검정 비닐에 명예, 아이디어, 옛날, 흥미, 카메라, 방금, 황금, 오래된 공구 상자, 흐름, 문득, 그 옷, 차마, 미공개 원고 등을 넣고 묶었다. 집요하지 않아서 자주 풀리고 나는 다시 묶는다.


  ”그림자 속에서 옷을 벗듯 빠져나온 건물들 사이엔 // 해의 분진을 핥으며 문득 사람의 말을 지껄이려는, / 눈빛이 청색 유리처럼 으깨진 / 병든 개 한 마리 // 중음(中陰)의 사령은 늘 죽음 직전의 청명을 품었다“ - <십자 그늘> 중


    조콜릿 감별사가 되려던 동생은 자신의 마라톤 풀 코스 신기록을 세 시간 삼십 분대로 끌어올렸다. 신기록 이후 마라톤을 그만두어야 했고 초콜릿 감별사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가려던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나중에 동생은 한국 여자와 프랑스 남자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아내는 요즘 새벽에 사라졌다가 오전에 나타난다. 마라톤 풀 코스에 도전 중이다. 풀리고 다시 묶는 그 사이에 나는 되도록 많이 지껄이려고 한다, 명사가 부족한 채로도...

 

강정 / 커다란 하양으로 / 민음사 / 158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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