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영원 아래서 잠시

[도서] 영원 아래서 잠시

이기철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정오를 지나면서 해가 났다. 구름은 걷혔는데 바람이 많았다. 숲을 뚫고 들어온 바람은 소리도 컸다. 응달로 접어들면 한기가 들기도 했다. 박차를 가하여 오르고 내리는 일에 열중하여 한기를 쫓았다.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노란 것은 산수유 꽃봉오리였고, 분홍인 것은 진달래였고, 하얀 것은 매실나무 꽃인 매화였다. 한껏 도사리고 있는 개나리 꽃봉오리들이 지천이었는데, 사진을 찍지 않았다. 다음 주에 아내와 함께 다시 이 길을 걷기로 했다.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으면서 / 뒤란까지 살펴보는 햇살 // 그 햇살 덕분에 / 어두운 물동이 속까지 환한 대낮” - <서정시 한 켤레> 중

 

  짐작만으로 길을 걸을 때도 있었다. 앞 사람의 그림자에 숨어서 바람을 피한 적도 있었다. 옆 사람을 흘깃거린 적도 있었지만 다행히 크게 넘어지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내 손을 잡아 주었는데 일일이 호명하기는 힘들다. 사실은 내가 잡힌 것인데 내가 잡아준 것이라고 착각한 이들도 적지 않다. 어차피 우리의 삶은 잠시, 라며 영원히 살기라도 할 사람처럼 허세를 잔뜩 부렸다.

 

   영원 아래서 잠시

  모든 명사들은 헛되다
  제 이름을 불러도 시간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금세기의 막내딸인 오늘이여
  네가 선 자리는 유구와 무한 사이의 어디쯤인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영원은 대답하지 않는다
  어제는 늙고 내일은 소년인가
  오늘의 낮과 밤은 어디서 헤어지는가
  이파리들이 꾸는 꿈은 새파랗고
  영원은 제 명찰을 달고 순간이 쌓아 놓은 계단을 건너간다
  나날은 누구의 방문도 거절하지 않는다
  이 윤슬 햇빛이 늙기 전에 나는
  어느 철필도 쓰지 않는 사랑의 문장을 써야 한다
  오래 견딘 돌이 체온을 버리는 시간
  내가 다독여 주지 못한 찰나들이 발등에 쌓인다
  무수한 결별의 오늘이 또 나를 떠난다
  나는 여기에 현재의 우편번호를 쓸 수가 없다

 

  오늘 본 느릅나무 가지는 마녀의 손톱처럼 길었고 아래 쪽으로 휘어져 있다. 한 겨울에나 어울릴 으스스한 모양이어서 놀랐는데, 바로 그 가지에 붉은 꽃봉오리가 매달려 있어서 더 놀랐다. 대추나무는 이두박근을 자랑하는 이처럼 가지를 수평으로 뻗다가 다시 수직으로 추켜 세운다. 그리고 그렇게 뻗은 가지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면 마치 하늘로 솟아오르는 불꽃처럼 보인다. 

 

  “아직 미완성의 오후에는 생활이 길바닥에 떨어져 뒹굴어도 줍지 않는다 곧 낭비해도 좋을 노을 시간이 찾아올 것이므로 어둠의 끝자락을 밟으면 하루의 뼈가 부러질 것이므로” - <오후 3시가 이마를 밟고 지나간다> 중

 

    아직도 사는 게 서툴러서 구경을 더 많이 한다. 흘러가는 것으로는 구름 만한 것이 없는데, 속도가 매번 다르다. 대부분 다정한 속도로 흘러가는데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는 구름이 다정하지 않은 속도로 흘러갈 때 집에 머문다. 뻬꼼히 문틈으로 바깥을 염탐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때 문지방을 넘는 것은 운명이고 문지방을 넘지 않고 집에 남아 있는 것은 염려이다. 

 

   냉이꽃

  저 작은 몸은 풍경을 만들지 못한다 풍경 속에 숨어 풍경의 세부가 된다 처음 태어난 땅이 낯설어 물음으로 흔들리는 영혼의 저 홑옷, 흰빛은 모든 빛을 다 돌아온 마지막 빛이다 그래서 쓰리고 아픈 빛 온몸이 입술인 저 무늬는 삼월의 모서리를 다 채우고도 남는다 꽃의 형식이 이리도 단순해 작은 이슬 한 방울에도 온몸이 젖는다 냉이꽃 이름은 꼭 한글로만 써야 한다 다른 말로 쓰려면 최빈국의 언어여야 한다 외로움은 그가 가진 전 재산이다 그의 가난에는 첨언할 내용이 없다

 

  불광중학교 옆으로 북한산에 이르는 샛길을 지나는데 중년의 사내가 삽을 둘러매고 텃밭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초로의 여인이 어디 가냐 묻자 사내가 냉이를 캐러 간다 하였다. 여인은 냉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 사내는 모르죠 그래도 어딘가 있겠죠, 라고 대답했다. 여인은 다시 사내를 향해 이제 삽은 필요 없을 낀데 호미를 써야 할 낀데, 라고 했고, 사내는 네, 라고 말하며 삽을 살짝 튕겨 다른 쪽 어깨로 옮겼다. 


이기철 / 영원 아래서 잠시 / 민음사 / 178쪽 / 2021 (2021)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