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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집

[도서] 단어의 집

안희연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문학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슬픔이라고 말하는 대신 복숭아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슬픔은 안으로 감추고 복숭아 이야기만 실컷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전해진다... 오늘도 나는 슬픔 대신 복숭아라고 말할 것이다. 언젠가는 복숭아의 외피를 두르지 않은, 슬픔의 맨살을 누설하기 위한 준비를.” (pp.234~235)

 

  한밤중 나는 고양이 들풀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이리로 와, 거기로 들어가지 마, 그거 물어 뜯지마... 잠시 멈춘 고양이 들풀은 거기서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정말 가만히 쳐다본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내가 고개를 모니터로 가져오는 척하였다가 휙 돌아보면 좀전의 그 자세 그대로이다. 그러나 모니터를 향한 채 한 문단 정도를 쓰다가 고개를 휙 돌리면 어느새 또 다른 말썽거리를 찾아낸 뒤이다. 나는 다시 맨살 같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튤립의 비밀을 말해줄게. 튤립을 사다 꽃병에 꽂으면 꽃송이가 테이블에 닿을 지경으로 축 늘어져버린다? 사람 손이 닿으면 그래(임상 실험으로 몇 번 확인). 최대한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면 물을 머금고 어느새 꼿꼿하게 선다. 그때 예쁘다고 줄기에 손을 대면? 그대로 콱 죽어버리겠다고 결심한 듯 금방 푹 고꾸라져. 겨울 냉기로 스스로를 지키고, 꺾인 후에도 아무 도움도 필요 없다는 듯이 구는 튤립을 보면서 혼자 오래 감상에 젖었더래지. 그래. 너는 그렇게 살고, 그렇게 꽃피우고, 그렇게 시들거라. 응원하게 되더라. 같은 마음으로 네게도 또 한번 응원을 보낼게.” (pp.51~52, <월간 여름> 2021년 3월 호에서)

 

  어느 때 나는 복숭아라고 말해진 것을 좋아하고, 다른 때 나는 슬픔의 맨살을 좋아한다. 과거에는 복숭아라고 말해진 것을 더 좋아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맨살 쪽을 더욱 좋아하는 것 같다. 어쩌면 《단어의 집》을 쓴 작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매달 ‘월간 여름’이라는 제목으로 보내는 독일에 사는 친구의 손편지를 향하여 진실 가득한 찬사를 보낸다. 나라도 그럴 것 같다.

 

  “매년 12월 31일에만 펼치는 노트가 있다. 무늬 없이 샛노랗고 크기는 손바닥보다 약간 작으며 겉면에는 ‘NOT TOO LATE’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한 해의 마지막 날에만 펼칠 수 있는 건 그것이 내 새해 소망을 모아둔 금고이기 때문이다. 새해 소망을 구구절절하게 적는 것도 금지된다... 딱 한 줄일 것.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일 것. 진심일 것... 새해 소망을 아예 쓰지 않겠노라 작정한 시간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백지는 어딘가 무책임해 보였다. 말뚝에 묶인 양을 풀어주되 초원을 떠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는 내 집, 내 삶의 장소이니까... 노트는 그렇게 탄생했다. ‘까다로운 작은 소망들’을 늦지 않게 채집하기 위함이었다.” (pp.80~81)

 

  산문집의 제목은 ‘단어의 집’이지만 실린 글들이 단어에 천착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삶 전체를 아우르는데 그렇게 아우르는 주체가 시인이다보니 저절로 단어들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정도로 이해하며 읽을 수 있다. 생각해보면 사물을 보든 상황을 보든 사람을 보든 단어를 통하지 않고 거기에 가서 닿을 수는 없다. 거기에 이르는 적당한 길을 걷기 위해서는 누구든 단어의 호위를 받아야 한다.

 

  “... 나에겐 예술가의 탄생을 그린 서사가 불편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예술가를 불우하거나 광기 어린 존재, 사랑에 갈급한 존재로 묘사하는 등의 서사에서. 왜 꼭 무언가를 관통해야만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 걸까. 드라마나 신화 없이도, 삶에 대한 건강한 충실성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 예술의 세계에 이를 수 있고 개성 있는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는데(언제나 나는 예술가는 절대적으로 제정신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p.140)

 

  적절하게 단어의 호위를 받다 보면 제대로 된 목적지에 도달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문필을 업으로 삼고 있든 그렇지 않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적절한 단어의 호위를 받기 위해서는 그만큼 ‘절대적으로 제정신’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작가는 잘 알고 있다. 모든 성장에는 광기라는 에너지가 포함되어 있다. 광기가 없는 성장은 없다. 과장된 광기와 포장된 성장이 좀더 눈에 띌 뿐이다. 

 

  “내가 쓸 수 있는 건 죽음 이후가 아니라 죽음 같은 삶으로부터 기인한 문장이다. 이 거대하고도 비좁은 묘실에서 보물인 줄도 모르는 보물들과 종종거리며 살아가는 이야기. 헛되고 헛되다는 말을 반찬 삼아 갓 지은 밥 앞에서는 주먹을 불끈 쥐는 이야기. 고고학자나 철학자의 사유보다는 허무맹랑하겠지만 그래도 이따금 정해진 선로를 이탈해 우주 바깥으로 상상적 여행을 떠나게 하는 시의 이야기.” (p.201)

 

  결국 말썽을 멈추지 않는 고양이 들풀을 향하여 분무기 공격을 감행했다. 고양이는 물을 싫어하고, 아내는 고양이에게 물을 뿌리는 나를 나무라지만 어쩔 수 없다. 정수리와 등에 물을 맞은 들풀은 잠시 나를 피해 도망쳤다가 다시 내게 다가오며 운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어 몇 번 더 꾸짖으면 풀이 죽은 채로 내 옆에 와서 앉는다. 그루밍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나는 그 사이에 얼른 리뷰를 마무리 짓는다. 


안희연 / 단어의 집 / 한겨레출판 / 260쪽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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