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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도서]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장석주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봄의 어귀에서 경쾌하게 자전거를 탔다. 불광천에서 시작하여 바람의 미끄럼을 타고 성산대교, 양화대교, 서강대교, 마포대교, 원효대교, 한강대교, 동작대교를 거쳐 반포대교까지 달려가 남쪽으로 강을 건넜다. 내처 한남대교, 동호대교, 성수대교, 영동대교, 청담대교를 내달렸고 잠실대교에서 다시 북쪽으로 강을 건넜다. 야속하지만 묵묵한 바람의 방향을 거슬러 페달을 밟으려니 숨이 찼다. 


 
   옛 노래

  저녁으로 감자를 구워놓고
  무쇠 난로 연통가에 젖은 옷 마르기를 기다렸네.
  목수인 아버지는 늘 귀가가 늦고
  낮은 담벼락 담뱃갑만하게 박힌 창문으로
  알전구 불빛 병아리 오줌만큼 흘러나올 때
  내 방황의 발걸음 행복했었네.
  가난한 아이들 웃음소리 기쁜 개나리꽃으로
  다닥다닥 피어나 지줄대기도 했는데
  세월이 흘러 문득 강물처럼 젖은 몸으로
  오늘 변두리 옛 동네를 지나면
  어설픈 철망으로 막아놓은 철거민들의 무너진 살림터
  때로는 가는 길이 슬픈 적도 있지만
  가슴에 품은 퇴색한 옛 사진 한 장
  행복은 추억으로만 남는 거라네.

 

  집으로 귀환하던 방향에서 확인한 강의 윤슬이 도톰하였다. 잘 꿰매어져 빈틈이 없는 밥상보처럼 촘촘하였다. 봄의 표정들이 여기저기서 나른한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지지 않으려고 몇 번을 멈추어 무엇인지 모를 것들을 만끽하려고 애썼다. 고백도 변명도 필요 없는 순진무구의 대기는 불온한 경계 같은 것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세밀하고도 높아서 눈이 가 닿는 곳마다 반짝거렸다.

 

   딸기

  비애로 단단해진 너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의
  목록 속에 있다
  초록 줄기에 알알이 맺혀 있는 너는
  별들의 계보에 속해 있다
  그러나 붉은 것은 왜 오래가지 않는가
  섹스 후 동물은 왜 슬픈가
  차마 꽉 깨물어 터뜨리지 못한 채
  혀 위에 올려놓고 굴리는
  이 정체불명의 비애가 나를 울린다

 

  해가 바뀌고 처음 핸들 바를 붙잡은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봄을 따라 술렁이려고만 했다면 힘을 빼야 옳았다. 일 킬로미터가 지날 때마다 스마트 워치는 평균의 속도와 달려온 거리와 지속된 시간을 알려주었다. 봄의 리듬을 타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건반을 누르듯 페달을 밟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가만두지 않아 불협화음이 만들어지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바람의 품으로 머리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항아리 물에 얇은 살얼음이 끼는 입동
  집밖에 내놓은 벤자민 화분 두 개가
  저녁에 나가보니 행방이 묘연하다
  누군가 병색 짙은 벤자민을 쏟아놓고 화분만 쏙 빼 가져간 것,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이다
  아직도 간장을 달여먹다니!
  그렇게 제 생을 달이고 있는 자도
  한 둘쯤은 있을 터

  검은 고양이가 아직 불 켜지 않은 거실을 가로질러 가는
  다수의 저녁이
  침울하게 지나간다

 

  내가 그리는 지도에만 있는 길, 내가 비틀거리면 따라서 비틀거리는 길, 진심으로 바라지 않으면 회전하지 못하는 길, 어느 순간 눈을 팔면 사라져버리는 길, 내가 끝났다고 말해야 비로소 끝이 나는 길, 가로지르는 이들을 뒤늦게 발견하는 법이 없는 길, 턱을 괴고 하루 이틀 바라보고만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길, 이미 시작된 봄을 따라 점점 확장되는 길, 난간에 기대어 손을 흔들어 마중하는 저녁으로 향하는 길...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집에 돌아와 혼곤한 몸과 마음으로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어쩐지 다정하여서 내가 지나온 길들을 묻고 또 대답하고 싶어졌다. 내가 달리는 동안 나는 기뻤는데, 어김없이 그에 상응하는 슬픔들도 있었으리라, 되뇌였다. 나는 이런 연고 없는 기분과 맞닥뜨릴 때마다 오려둔다. 시집의 페이지를 넘긴다. 그러니까 어제는 그저 봄의 티저였을 뿐이고 곧 팝콘처럼 터지는 아름다움으로 몇 번 더 서글플 것이다.


장석주 /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난다 / 189쪽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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