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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도서] 기러기

메리 올리버 저/민승남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삼 년 전, 십팔여 년을 함께 한 고양이가 우리 곁을 떠났다. 아내가 내가 선택한 결과였다. 마지막 며칠 고양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페에 물이 찼고 어떤 자세를 취해도 숨을 쉬는 것이 불편해져만 갔다. 나와 아내는 고양이의 병간호를 십팔 개월 동안 했고, 그 긴 간호가 시작될 때 참가하였던 한 고양이 모임의 참가자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 고양이는 저 때문에 쉽게 떠나지도 못하고 고생을 했어요, 지금이라면 다른 선택을 할 거예요.


   마렝고 늪


  구정물에서 금잔화 피어나네.
  모기떼 모슬린 천같이 덮인 늪가에서
  구름옷 걸친 백로 날아오르네.
  안개 같은, 운모 같은 보슬비 사이로
  시든 이끼 벌판 되살아나네.


  나는 죽는다면, 비 오는 날
  죽고 싶어―
  긴 비, 느린 비, 영원히 그칠 것 같지 않은 비.


  그리고 하늘이 비를 삽으로 퍼내고 퍼내는 동안 열 수 있는
  작은 의식을 치르고 싶어,


  그리고 그 의식에 오는 사람은 커다란 늪 가장자리를 돌듯
  천천히, 생각에 잠겨서 여행하겠지.


  기로에 서다, 라는 말이 있다. 그것이 나의 기로, 라면 나는 선뜻 선택할 수 있다. 나는 후회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그런 탓에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일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기로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누군가의 앞에 놓인 길을 대신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리 쉽게 제스처를 취할 수가 없다. 나는 그 상태로 자전거를 타고, 산을 오르고, 수영을 한다. 선택을 미루고, 아는 길을 아는 제스처로 오간다.


   아침


  소금이 원기둥 유리통에서 반짝이고 있어.
  푸른 그릇에 담긴 우유. 노란 리놀륨.
  고양이가 베개 위에서 검은 몸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
  작은 친절의 몸짓에 곡선미로 응답하는 거지.
  그러곤 우유를 핥아 그릇을 깨끗이 비워.
  그러곤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해.
  아무 이유 없이 가볍게 잔디밭을 가로질러 뛰어가
  풀 위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어.
  나는 잠시 고양이를 지켜보며 생각해.
  내가 야생의 말들로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나는 추운 부엌에 서서 고양이에게 고개를 숙여.
  나는 추운 부엌에 서 있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경이로워.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두 개의 질문이 있다.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천만원을 갚으라고 통보하였다. 나는 직장을 그만 둔 상태였고 (물론 아버지는 알지 못하였다), 아내의 월급에서 일부를 떼어 아버지가 (목돈이 없는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의 이름으로 개설한 삼 년 만기의 적금 통장에 매월 오십 만원 가량을 이체하였다. 적금의 마지막 몇 달은 아내의 카드빚으로 감당했는데, 이후 나는 다시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신이 할 수도 있는 몇 가지 질문들


  영혼은 쇠처럼 단단할까?
  아니면, 올빼미 부리 속 나방의 날개처럼
  가냘프고 부서지기 쉬울까?
  누가 영혼을 가졌고, 누구는 갖지 못했을까?
  난 계속 주위를 둘러보지.
  말코손바닥사슴의 얼굴이
  예수의 얼굴처럼 슬퍼.
  백조가 흰 날개를 천천히 펼쳐.
  가을이면, 검은 곰은 어둠 속으로 나뭇잎들을 옮겨.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
  영혼은 형상을 갖고 있을까? 빙산 같은?
  벌새의 눈 같은?
  뱀과 가리비처럼 폐가 하나일까?
  어째서 나는 영혼을 갖는데, 제 새끼들을 사랑하는
  개미핥기는 영혼을 못 갖는가?
  어째서 나는 영혼을 갖는데, 낙타는 영혼을 못 갖는가?
  그러고 보니, 단풍나무는 어떨까?
  파란 붓꽃은 어떨까?
  달빛 아래 홀로 앉아 있는 작은 돌멩이들은 어떨까?
  장미, 레몬, 그리고 그 빛나는 잎들은 어떨까?
  풀은 어떨까?


  다른 하나의 질문은 아버지가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의 일이다. 이삿짐 정리를 위해 들렀던 내게 아버지는 어린 시절 내가 받은 상장이 잔뜩 든 상자를 내 앞에 놓고 물었다. 가져갈까? 나는 대답했다. 됐어요. 상자를 들고 나가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집 옆 공터에는 아버지가 파놓은 구덩이가 있었고, 아버지는 다른 잡동사니들과 함께 내 어린 시절의 기록물을 태웠다. 열기로 붉어진 얼굴로 내가 아버지를 도왔다. 


   블랙워터 연못에서


  밤새 비 내린 후 블랙워터 연못의 뒤척이던 물결이
  잔잔해졌어.
  나는 두 손으로 물을 뜨지. 그 물을
  오랫동안 마시지. 물에서
  돌과 나뭇잎, 불 맛이 나. 물은
  내 몸속으로 차갑게 떨어져, 뼈들을 깨우지.
  뼈들이 내 몸 깊숙한 곳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오, 방금 일어난
  그 아름다운 일은 뭐지?


  두 달 전, 코로나를 앓고 난 이후 (인과 관계를 알 수는 없으나) 아버지의 영혼과 육신에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나는 한 달 보름여 동안 주중에는 점심을, 주말 중 하루는 저녁을 부모님과 함께 했다. 나는 여전히 후회하기를 싫어 하는 인간이고, 그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쉬운 선택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렇게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다독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냈다.

 

메리 올리버 Mary Oliver / 민승남 역 / 기러기 (New and Selected Poems 1) / 마음산책 / 379쪽 / 202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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