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 내리는 고통의 더미들에는 여러 종류의 허접한 감정들이 있다. 그러니까 애매한 억울함이나 단단해지지 못하는 분노, 불편한 죄책감과 금세 날아가버리는 가벼운 슬픔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게 폐허가 된 나란 존재를,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물끄러미 바라보면, 어느새 시간은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하고, 벽에라도 갇힌 것처럼 옴짝달싹 멈춘다.
날개 곁으로
아침이 아침으로 밤이 밤으로 그리하여 너를 지나 드디어 내가 돌아가고, 돌아가고, 돌아가는 그곳,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다 가는, 모든 것들의 곁, 바람 같은 봄날이 나비 나는 봄날을 지나 산제비꽃 핀 몇 개의 무덤을 지나 검은 바위 넘어 바람이 쉬는 날개 곁으로
진작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들은 앞으로도 알아차리기 힘들 것들이다. 홍제천 머리 위를 지나는 내부순환로를 지탱하는 교각들에는 꽤나 크게 (아마도) 프린트된 명화들이 붙어 있다. 교각들 사이로 오리가 헤엄치고 명화들을 뚫고 왜가리가 날아간다. 강아지풀이 거칠게 자라고 튀어나온 바위에 숨은그림처럼 자라가 자리 잡고 있으며 아이들은 큰 걸음으로 징검다리를 건너 간다.
“나비는 얼마나 먼 데서 달려오다가 날개를 달고 날아 올랐을까요” - <나비가 날아오르는 시간> 중
한동안 나는 책을 읽는 척만 하고 있다. 시집을 읽을 때는 먼 산을 겨냥하고 소설을 읽을 때는 어떤 바다를 가늠한다.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풀이 자라고 자갈이 굴러다닌다. 멈출 생각이 없는 성장이고 움직임이며 멈추도록 해야겠다는 의지도 박약하다. 눈에 띄는 활자가 없으면 박제된 텍스트를 현재로 소환하기도 하였는데, 이제 그런 적이 언제 있기라도 하였나 시치미 떼고 허송하는 중이다.
사람들이 버린 시간
사람들이 버린 시간 속에 산다
담요로 무릎을 덮고
강 쪽으로 앉아 시를 읽는다
지붕에는 눈이 쌓이고
눈을 안고 물속으로
가라앉는 돌이 되어
가면을 쓴 채로 삶에 들이닥치는 많은 손님들을 환대하였다. 정돈되지 않은 표정들은 대충 구석에 던져 놓고 천 쪼가리로 덮어버린 것이다. 들춰서 드러내려고 한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적당히 교체하였고 어느새 패턴이 생겼으며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패턴에서 벗어나거나 타이밍을 놓치면, 과거에는 주로 머리를 쥐어뜯었고 이제는 고작 머리를 부여잡는다.
꿈을 생시로 잇다
달빛으로 시를 썼다
달빛이 견디기 힘들면 가만가만 집을 나와
달이 내려준 산그늘까지 걸어가
생각을 접어주고
발자국을 거두며 돌아왔다
가난하고 가난하여서
하나하나가 일일이 다 귀찮지 않았다
꿈속에서도 시를 쓰다 잠이 깨면
연필이 손에 꼭 쥐어져 있어서
꿈을 생시로 잇기도 하였다
모두에게 단어가 있고 문장이 있고 말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아직도 그렇게 믿는다. 나는 한 번씩 모두를 모아놓고 단어며 문장이며 말이며 이야기까지 모아놓고 한꺼번에 부서지는 모양을 상상한다. 내가 이미 대면한 것들을 무너뜨리고 아직 대면하지 못한 것들을 흥미롭게 기다리고 싶다. 타협은 파렴치해 보이고 조율은 언제나 실패하니 삶에 걸맞는 칭추는 여태 찾지 못하였다.
김용택 /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 문학과지성사 / 88쪽 /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