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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디지털)

[영화] 시 (디지털)

개봉일 : 2010년 05월

이창동

한국 / 드라마 / 15세이상관람가

2010제작 / 20100513 개봉

출연 : 윤정희

내용 평점 5점

  소설을 쓰던 감독이 영화로 써 내려간 시라고 해야 할까.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지금까지 감독이 만들었던 영화 하나하나가 모두 순정이 가득한 시의 풍모를 격하게 품고 있었지만, 이번 영화는 그야말로 그러한 영화들이 품고 있던 그 격한 시적 순정의 정수를 고스란히 뿜어내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 지독하고 처절한 영화를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영화를 보고 나서 육개월이 흘렀어도 이렇게 리뷰를 써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것이 분명한 소녀의 익사체로부터 시작된 영화는 이창동 특유의 영화 화법으로 느릿하게 진행된다. 엄마와 떨어져 할머니에게 맡겨진 손자 종욱은 그 나이에 어울리게 세상만사를 따분하게 여기는 것 같다. 방구석을 뒹굴거나 친구들의 호출에 튕기듯 나가는 것이 전부인 인생이다. 바쁜 것은 오히려 종욱의 할머니 미자이다. 미자는 손자를 돌보는 틈틈이 간병인 아르바이트를 하고 또한 시 창작 교실에 나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를 쓴다, 아니 시를 쓰기 위해 세상을 열심히 바라보려고 애쓴다.


  사실 영화가 시작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갈 때까지 난 부끄럽게도 지루하다, 라고 연거푸 속으로 뇌까렸다. 이런저런 스포일러를 통하여 이미 천인공노할 행태가 만천하에 공개된 미자의 손자 종욱을 바라보는 시선도 지겹기 그지 없었고, 자신의 아이들을 위하여 더럽고 포악하게 손을 맞잡은 학부형들을 바라보는 것도 역겨웠으며, 그러한 학부형들 틈에서 천천히 스스로를 잊어가면서도 안간힘을 쓰면서 시를 붙잡고 있는 미자는 다만 안쓰러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적처럼 나는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또한 그 몰입의 순간은 내가 마냥 지루하다고 여긴 그 시간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야 했다. 그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바로 지금의 몰입이 가능한 것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경험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고전적인 텍스트를 통하여 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이제 이창동의 영화는 클래식한 텍스트의 경지에 오르는 중이다, 혹은 이미 올랐다.)


  이제와서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쩌면 불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들 포악한 현실과 가장 먼 곳에 있다고 여겨지는 문학 장르인 시, 그 시가 지독하고 이기적인 우리의 현실과 맞닥뜨리는 순간에 대한 강론이 아닐까 넘겨 짚어 봤다거나, 어떻게 해야 시를 잘 쓸 수 있냐고 순진무구하게 묻는 이 노인 미자의 입을 통하여서 속물처럼 질주하고 있는 우리들을 돌아보게 된다는 아이러니를 느껴야 했다는 등의 말을 이곳에서 백날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명불허전의 영화는 은유도 없고 상징도 없으며 운율도 사라지고 노랫소리 망각한지 오래인 이 삭막한 현실을 배경으로 삼아, BGM 하나 없이 그저 몇 가지 음향에 의지한 채 시의 역할에 대해 모니터링한다. 그러니 감독이 직접 썼다는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순교자 아녜스의 노래를 듣는 순간 가슴 안에 그득하게 샘솟는 무언의 시를 (그것도 전직 대통령의 억울한 죽음을 일 년여 전에 느껴야 했던 우리로서는)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아녜스의 노래>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 이제 작별을 할 시간 /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 작별을 할 시간 //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 나는 기도합니다 /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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