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폭주하듯 살았던 이십대 후반, 술친구였던 여성으로부터 선물을 받고 뭔가 돌려줄 것이 없나 고민을 하다 이런 약속을 했다. “나중에 말이다. 혹시 모든 사람이 너에게 돌은 던지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면, 너의 행위가 무엇이든 딱 한 번만큼은, 너의 편이 되어 주도록 할 생각이다.” 그 후로도 우리는 수없이 함께 술을 마셨고, 가끔 다투고, 서로 험담을 하고, 그사이 내가 진작 결혼을 하고, 또 시간이 한참 흘러 그녀 또한 작년이던가 결혼을 하였다.
다행인지 오랜 세월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저 약속을 지킬만한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나에게 돌을 던질 일이 그리 흔하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물론 아직 저 약속은 유효하다. 그러고보니 최근 읽은 이응준의 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 속 주인공 또한 비슷한 말을 하였다. 누군가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한 사람만 있다면, 그 사람은 버틸 수 있다는 류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언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이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헤어나오지 못했던 어떤 근원적 상실감을 풀고 싶어하는 마음의 발로였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는 이처럼 자신의 편이 되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영화 속 그들은 공평하여서,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다른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분노하던 남자를 처음으로 조용히 끌어안은 여자는 결국 분노를 위로받고자 하였던 남자를 통하여 또 다른 위안의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일방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기만 하던 남자, 일방적으로 억압받으며 움츠러들기만 하던 여자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함으로써 자신의 분노와 억압을 극복한다.
영화는 어둡고 침침하다. 이야기는 참혹하고 불편하기까지 하다. (영화적 필요에 의해서이겠지만 영화의 시작 즈음, 그리고 영화의 끄트머리에 등장하는 동물의 죽음은 더더욱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러한 불편한 스토리의 영화에 그나마 몰입하도록 만드는 것은 조셉과 한나를 연기한 피터 뮬란과 올리비아 콜맨, 그리고 한나의 남편을 연기한 에디 마산의 연기력이다. 관객에 대하여 절대 친절하지 않은 영화를 보는 수고를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들 배우의 속 깊은 곳으로부터 폭발하는 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삶의 내면에 뼈처럼 드리워진 분노로 가득한 조셉과 (어쩌면 조셉 자신이 죽은 아내에게 휘둘렀을지도 모르는) 삶의 이면에 도려내야 할 살처럼 도사리고 있는 폭력에 억압당한 한나, 그들이 서로 딱 한 번 상대방의 편이 되어주기로 작정하는 순간, 그들은 그 딱 한 번의 순간을 통하여 서로를 구원하거나 구원받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또한 딱 한 번, 누군가를 위하여 그 희귀한 제스처를 해야 할런지도... 물론 그러한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