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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는 거울

[도서] 도망가는 거울

조반니 파피니 저/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이승수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보르헤스는 파피니가 잊힌 게 부당하다고 말한다. 책에 실린 파피니의 단편 소설들을 보고 있자면 보르헤스의 이러한 판단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백 년이라는 시간의 텀을 두고 있지만 파피니가 구사하는 소재나 주제는 전혀 고루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지금 시대에 더욱 어울리는 이야기들이라고 보여진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삶에 대한 회의라는 꽤나 모던한 주제가 심플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서술되고 있다. 짧은 분량의 단편들이지만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가진 이야기들이니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보건대 한창 마음이 떠들썩하던 문청 시절, 파피니의 글을 읽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파피니의 인물들은 허구 밖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 같아서 우리는 파피니를 책망할지 모른다. 이것은 우리의 작가 파피니가 치명적인 시인이었고, 수많은 이름으로 그려진 그의 영웅들이 그의 자아의 투사물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나는 파피니가 잊힌 게 부당하지 않나 생각한다. 이 책 속의 단편들은 인간이 우수에 빠지고 황혼녘의 쓸쓸함에 젖었을 당시 생겨났다. 그 우수와 황혼의 쓸쓸함은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의 예술은 그것에 다른 옷을 입혔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연못 안의 두 이미지」.
자신이 살았던 도시로 다시 돌아온 나는 그곳 연못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 넌 네 영혼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이 연못에 남겨 두고 갔잖아. 이 영혼을 가지고 난 지금까지 살았어... 나는 예전의 네 모습이야...” (p.22) 그렇다. 나는 나의 과거인 남자와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도시에서 함께 시간은 보내게 되는데, 점점 나는 그 남자와 함께 하는 시간들에 지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이른다.


「너무나 부조리한 이야기」.
어떤 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쓴 소설을 들이민다, 만약에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즉시 목숨을 끊을 것이라는 비장한 각오와 함께... 그런데 그렇게 듣게 된 그 남자의 소설은 ‘나의 내면과 외면의 삶을 정확하고 완벽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소설이 책으로 발간되기를 원치 않는다. 결국 나는 나의 삶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셈인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와 나는 집을 나서 함께 길을 걸었고, 그 남자는 나에게 읽어준 소설과 함께 불어난 강물로 뛰어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이미 죽은 사람 같았다.’ 라고 느낀다.


「정신적인 죽음」.
어느 날 나는 구매한 책에서 ‘스스로 조금씩 자신의 생명을 부정하고 파괴해애 한다.’라는 자살의 방법이 적힌 메모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책에 찍힌 인장을 보고 그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드디어 메모의 주인인 크레슬러를 만나고 그에게서 죽음에 관한 이런저런 말을 듣게 된다. “... 우리가 순간순간 열심히 살아간다 해도 삶은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이며, 모든 희열은 긴 죽음의 고통의 수많은 경련과 헐떡임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p.61~62) 라거나 “... 살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살기를 원합니다. 죽기 위해선 점점 삶의 욕망을 줄이고, 살고 싶지 않다고 원하면 됩니다. 삶 전체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어떤 것을 위해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다면 삶은 비어가고 점점 부풀어 오르게 되어 있죠...” (p.63) 와 같은 말들을 말이다. 삶에 대해 이토록 회의적인 소설과 마주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병든 신사의 마지막 방문」.
모두에게서 ‘병든 신사’라고 불리었던 남자로부터 그가 사라지기 전 날 들은 이야기를 적어 놓은 소설이다. “... 나를 꿈꾸는 어떤 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합니다. 잠자면서 꿈을 꾸고, 그 꿈속에서 내가 행동하고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이 모든 말을 하는 것을 또한 꿈꾸고 있습니다. 이 어떤 사람이 나를 꿈꾸기 시작했을 때 나의 존재는 시작됩니다. 극 잠에서 깨면 나는 존재하기를 멈출 겁니다...” (p.72) 아마도 <나이트메어> 프레디의 백 년 전 버전이지 않을까.


「넌 더 이상 지금의 나이고 싶지 않다」.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자 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지금의 내가 아니고 싶은 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나의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갈망에 대해 말해주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 누구도 품지 않은 갈망을 품은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현재의 것에서 벗어날 가장 좋은 길 위에 서있는 거야. 자네는 자네 영혼의 문턱에 있네. 누가 아나? 밖에 있는 어둠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그 문턱을 넘어 나갈 수 있을지.” (p.87) 그리고 이런 조언을 듣게 된다.


「넌 누구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배달되던 편지가 단 한 통도 배달되지 않은 날, 그리고 그 이상한 날 이후, 그렇게 자신과 친했던 친구들조차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 나는 혼자였다. 하지만 로빈슨이나 조난자처럼 구출의 희망을 갖고 혹은 집으로 돌아갈 꿈을 안고 섬이나 뗏목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대도시 한가운데, 수많은 사람들 한가운데, 나를 밀쳐 내고 부정하며 자신들 삶에서 떼어 버리려는 사람들 가운데 홀로 있는 거였다.” (p.100) 하지만 이 외로움 혹은 기이한 경험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과 상관없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인정을 하는 순간 사라지게 된다.


「추억을 구걸하는 거지」.
“어떤 사람이든지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삶 전체를 서술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쓰인 가장 위대한 소설들 가운데 하나를 저술하는 것이다.” (p.108) 분명 어디선가 읽은 글귀인데, 그러한 글귀를 소설 안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 또한 기이한 경험이다. 이 글귀는 소설 속 주인공의 생각인데, 그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누군가의 추억을 구걸하는 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생각은 거리에서 만난 누군가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무참히 깨어지게 된다.


「자살 대행」.
서른 세 살, 예수가 극한 고통을 받으며 죽은 나이를 언급하며 쓸모없는 친구가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친구 대신 자살을 하겠다는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도망가는 거울」.
“... 여러분, 당신들의 삶은 당신들의 희생으로 당신들 자신이 만들어 내는 잔인한 사기입니다. 악마들만이 자꾸 도망가는 거울을 향해 질주하는 여러분을 보고 차갑게 웃을 겁니다!” (p.138) 아마도 지난 세기 초, 지금과 비견될만큼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 그리고 그 사회에 적응해 가기 위해 애를 쓰는 인간에 대하여 작가는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불안해했을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을 읽고 나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돌려받지 못한 하루」.
내 젊은 날의 시간을 누군가가 사겠다고 한다면... 그 젊은 날의 시간을 누군가에게 팔았고, 내가 늙은 이후 그 누군가로부터 그 젊은 날의 시간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다면... 늙은 내가 그 누군가로부터 나의 젊은 날을 조금씩 돌려받아서 그 시간만큼 젋은 나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런데 그렇게 돌려 받을 젊은 날도 점점 줄어들게 되고, 결국 다시는 젊은 날을 경험할 수 없는 나이든 나로서만 살아야 한다면... 이 작가의 상상력은 너무나도 현대적이다. 그러니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조반니 파피니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이승수 역 / 보르헤스 세계문학 컬렉션 바벨의 도서관 - 25 도망가는 거울 / 바다출판사 / 159쪽 / 2012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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