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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운 것들은 쇳소리를 낸다

[도서] 서러운 것들은 쇳소리를 낸다

장봉숙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서러운 것들은 쇳소리를 낸다

장봉숙

고요아침/2021.6.14.

sanbaram

 

      장마

 

하늘이 검은 상복을 입었다

슬픔들이 지상으로 흐른다

 

왕원추리가 환하게 조등을 내 걸었다

 

검푸른 숲은 괴기스럽다

땅은 눈물에 젖어 흐느적거리고

꺼이꺼이 골짜기마다 통곡을 한다

얼마나 애달픈 사연 있기에

저리 무섭도록 눈물 쏟아내는가

 

같은 사물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배우자를 여의고 슬픔으로 가득한 시인의 마음에는 비를 잔뜩 머금은 검은 구름이 마치 상복을 입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하늘뿐만 아니라 짙은 구름으로 어둑하게 보이는 땅에 사는 생물까지 슬픔에 동참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환하게 핀 주황색 왕원추리꽃은 마치 조등을 내 건 것처럼 보인다. 아울러 산골짜기를 휘돌아 오는 비바람 소리는 통곡소리로 시인의 마음과 공명하고 있다. 이미 하늘나라에 간 사람을 아직도 보내지 못한 마음이 전달되는 시다.

 

 

      일기예보

 

날씨 우중충할 때마다

낡은 집에선

휘파람 소리가 난다

 

황소바람 수시 드나들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삐걱거리는 낡은 계단

마디마디

가쁜 숨 턱에 찬다

 

오늘은

흐리거나 비

관절은 정확한 일기예보 기상캐스터

 

비가 오기 전에 옛날 할머니들은 장독을 덮으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어려서는 그것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나이든 몸은 안 아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날이 궂으려 기압이 내려가면 온 몸이 쑤신다. 한 평생 몸을 위해 봉사한 팔다리, 허리가 모두 아우성친다. 그래서 일기예보를 듣지 않아도 비가 오거나 구름 낄 것쯤은 능히 안다. “얘야, 비 오기 전에 장독 덮어라!” 외치시던 할머니 나이가 된 시인의 경험이 녹아 있는 글이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들, 특히 큰 수술을 경험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시다.

 

 

      서러운 것들은 쇳소리를 낸다

 

산을 넘고

재를 넘어

들을 휩쓸며 건너온 바람에게선

쉬익쉬익 쇳소리를 낸댜

 

병마와 동거중인

삭정이 같은 몸에선

가랑가랑

바이올린 현 긁는 소리

 

등 굽은 노파의 숭숭 뚫린

뼈마디마디에서는

색색 녹슨 기계음 소리

 

내뿜는 한 숨에서도

가슴 에이는

쇳소리가 난다

 

누군들

한 생이 만만했으랴

 

서러운 것들은 쇳소리를 낸다

 

쇳소리는 날카롭기 때문에 귀에 거슬린다. 살아서 잎을 달고 있는 부드러운 가지를 스치는 바람은 쇳소리를 내지 않는다. 산을 넘어오는 바람도 삭풍에 나뭇잎 다 떨어진 나뭇가지를 지날 때만 쇳소리를 낸다, 그러나 겨울이 되지 않았어도 병마에 시달려 잎을 떨군 삭정이 가지를 지나는 바람은 쇳소리를 낸다, 잠깐의 운동에도 벌어진 목을 지나 토해내는 가쁜 숨결도 쇳소리를 닮았다, 모두가 힘에 부쳐 내는 서러운 소리다. 한 평생 갖가지 풍상을 겪으며 굳어진 몸이기에 작은 움직임에도 서럽게 쇳소리를 내는 것이리라.

 

 

      영정

 

삭각의 틀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구나

그 곳이 낙원이더냐

 

하도 당당해서

금방이라도 불쑥 튀어나와

어깨 감싸고 방긋 웃어줄 듯한데

 

틀 안과 틀 밖이

그 거리 가늠할 수 없어

아득하구나

 

억장이 무너진다

가슴에 묻은 내 이름 석 자가

대못이다

 

하필이면 왜 너냐고

하늘 향해 눈 부릅뜨고

주먹질 하건만

 

너는 햇살처럼

그저 환하게 웃고 있구나

 

엊그제까지만 해도 살을 맞비비던 사람이 영정 속 사진이 되어 웃고 있다. 보는 사람 마음이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저 당신 혼자 좋은 듯 밝게 웃는다. 저승과 이승이 갈린 다음에야 액자 속 웃는 얼굴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가슴에 묻은 이름 석 자가 가슴을 찢어 놓기에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해보건만, 영정 속 사진은 말 한마디 없이 그저 환하게 웃고 있을 뿐이다.

 

 

      전광판

 

부품 수리공장 같다

머리 목 팔 다리 옆구리 눈 코 귀까지

깁스 아니면 고정된 링거를 매달고

유령처럼 걷거나 휠체어다

수술실을 거친 투사들이다

웃음이 말라버린 무표정들은

난파당해 흘러간 무인도처럼 적막하다

생과 사를 넘나든 고뇌가

너무 치열했던 기억은 지워야 한다고

잘려나간 암 덩어리를 위해 지금은 애도 중이라고

저만치 보였던 하늘 길이 사라졌다고

말없이 온 몸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들

 

하루 종일 전광판엔

부품을 수선할 사람들의 이름이

부유물처럼 떠 있다

 

병원의 전광판엔 환자의 이름이 뜬다. 제각각의 사연을 안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 누구 할 것 없이 몸의 일부를 떼어내고, 꿰매고, 싸맸지만, 하늘의 부름에서 벗어났다는 안도 때문에, 아픔을 감추고 제 이름 석 자를 기다린다. 내일은 어떨지 모르지만 오늘은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다. 엊그제 하늘 길에든 옆 침대의 환우는 이제 나와는 관계가 멀어졌다고 안심하지만, 부품을 수선해야 하는 기계처럼 내 차례를 기다릴 뿐 할 일이 없다.

 

 

      천일염

 

염천의 담금질에

물기 다 빼앗긴

저건 마른 뼈 조각들

고단한 삶

고행한 생의 사리들

 

스님들의 수행으로 만들어지는 사리는 불에도 타지 않고 영롱한 빛으로 남는다. 바닷물이 하얗게 빛나는 소금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햇살과 바람에 물기를 말렸을까? 햇살에 물기를 다 빼앗기고 하얗게 빛나는 소금은 그래서 하얀 사리 같다. 그렇기에 살아가는 생물들에게 생명의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으리라. 하늘 볕과 바람결의 수행을 마친 소금을 사람들은 천일염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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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아자아자

    모든 시들이 절절합니다. 구곡간장 끊어낸다는 표현이 이럴까 싶어요. 통렬한 후회, 그리움이 사무치는 대단한 심경이 읽는 이도 처절합니다.

    2021.07.22 16:51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산바람

      반세기를 함께한 배우자를 여의고 써내려간 시라서 애닯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2021.07.22 18:09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