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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하늘

[도서] 석조 하늘

N. K. 제미신 저/박슬라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5점

1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가설과 논증과 증명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미지의 것들, 과학의 손아귀를 벗어나 우리를 수식 너머로 꾀는 신비로운 것들을 마법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마법이 굳이 우리의 현실과 많이 동떨어져 있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낸 세계의 원리가 전부 진실이라는 증거도 없는데, 어쩌면 대지는 제미신의 세계처럼 은빛 실의 충만한 생명력으로 꿈틀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마법의 등장에 거부감을 느낀 것은, 과학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나 마법은 비이성적이고 불가해한 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계의 법칙은 과거의 사람들에겐 재앙과도 같은 불가사의였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 인식이 닿는 범위의 것들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우리의 편협한 인식을 벗어난 것들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을 마법이라 부르면 안 될 것은 또 뭐고, 우리가 다 안다고 자부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가 그러한 마법으로 이루어져 살아 움직인다 상상하면 또 안 될 것은 무엇인가? 결국 나는 제미신의 세계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2

  그럼에도 아직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다. 결말이 궁금해 필요 이상으로 빨리 달린 탓도 있다(나중에 한 번 더 읽어보고 싶다, 이 이야기를 어느 정도 잊은 다음에, 새롭게). 전보다도 더, 수수께끼의 형태를 띠고 주어지는 힌트가 많았기에, 그동안 쌓아온 호기심이 시원하게 해소되지는 않았다. 실 아나기스트의 이야기에서부터 머리를 싸맸고, 달의 붕괴와 문명의 멸망에 이르렀을 땐 반쯤 포기하며 읽었다. 지금껏 상상해 보지 못한 포스트-아포칼립스의 형태라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포스트-아포칼립스, 지구 위 인류의 멸망을 상상하면 보통은 황폐화된 대지, 오염된 파편이 흩날리는 사막, 딱딱하고 차디찬 금속 물체의 번영, 기계로 이루어진 도시 등을 그려볼 텐데, 실 아나기스트는 로봇보다는 생명 공학 쪽을 더 선호한 느낌이었으므로. 상상해본 적 없는 고대 문명, 행성을 지배할 정도로 강했던 사문명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그래서 더욱 영상화가 기다려진다. 뛰어난 상상력과 예술 감각을 갖춘 사람이 그려낸 실 아나기스트 문명이 보고 싶다(오로진이 일반 사람들보다 대지의 소리를 잘 보니듯, 예술가는 나보다 영상의 감각을 잘 벼려낼 것이다).

 

3

  계속해서 실 아나기스트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은데, 원래 사문명이란 그의 닿을 수 없는 속성 때문에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작가가 그려낸 문명 자체가 매력적이기도 해서 그렇다. 그렇게 계속 코어 포인트의 세상을 골몰히 더듬으며 상상해 보고 있었는데, 미야자키 스튜디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가 언뜻 떠올랐다. 라퓨타인이 버리고 떠나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텅 빈 성이 나무와 정원에 뒤덮인 모습이 죽어버린 실 아나기스트의 거주지에 오버랩된다. 가는 길이 숨겨져 있어 쉬이 도달할 수 없고, 생명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는 그런 버려진 거대한 도시... 그 도시에서 자행된 잔혹 행위와 폭력은 잊을 수 없어 어딘가 묘한 거부감이 속에서 부글대지만, 그런 어두운 과거마저도 그 도시의 모습을 계속해서 상상할 수밖에 없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4

  이 이야기는 SF 판타지다. 과학 판타지 판타지라는 소리이다. 판타지이되 과학적이라 할 수 있는. 내가 그동안 읽어온 SF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그러나 당연히 SF인 이야기. 맨 처음 말했다시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해서 과학이 아니란 소리는 아니다. 그래서 부서진 대지 시리즈를 읽을 때에는, 타 SF 소설을 읽을 때와는 조금 다른 사고의 흐름을 통해 읽으면 좋다. 각 권은 과학에서 연금술로, 연금술에서 마법의 순간으로 사고를 확장해가는데, 과학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고수하다간 이야기의 끝까지 달리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맨틀 사이를 지나는 이동수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내가 그럴 뻔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5

  주인공이란 으레 상처가 많고, 요즈음에는 등장인물에게 육체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를 더 많이 지우는 것 같다. 그럼에도 에쑨과 나쑨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 지가 문장을 넘어 잘 다가와서... 그들의 감정의 소용돌이, 특히 사랑의 감정과 절박함에 많이 몰입했던 것 같다. 특히 나쑨의 길이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게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는... 나쑨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하며 길 위를 헤매는 것은 나에겐 바람직한 모습으로 보이진 않았으나, 나는 아직도, 그리고 아마도 평생, 누군가의 엄마이기보다 누군가의 딸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므로, 아이의 마음에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이였던 때를 생각해 보면, 작은 일도 무척이나 큰일처럼 느껴졌고 배신감은 오래오래 남아 자세한 내용은 스러져도 그 순간의 강렬한 감정은 때때로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존재를 미워하게 되는 과정이 순탄치 않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니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나쑨의 심정이, 문장으로 표현된 것보다도 더 갈기갈기 찢긴 모양새를 하고 있으리란 것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에쑨은 샤파에게서 빼앗기고, 나쑨은 에쑨에게서 빼앗겼다(지자는... 여기서 논외다. 그리 중요한 사람은 아니므로). 사람은 무서우리만치 자신이 배운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세상이 모두에게 좋은 곳이 되려면 어느 한 시점에는 타협이, 휴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빼앗음은 빼앗김을 낳고, 빼앗김은 또 다른 빼앗음을 퍼뜨리며 행성을 죽음의 향으로 스멀스멀 덮어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랑한다. 그렇지?

 

6

  나는 부서진 대지 시리즈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 인물이 사랑스럽다. 다마야, 시에나이트, 에쑨, 나쑨, 통키, 이카, 햐르카, 다넬, 켈렌리,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여행자들까지도. 그들은 옛 사회에서(혹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자가 가지고 있으면 미움받을 만한 특질도 여럿 갖추고 있고, 때로는 자기주장이 세며, 때로는 안하무인이다. 분노에 차올라 학살을 자행하거나, 뛰어난 리더십으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이끌어가거나, 장군의 위치에서 군대를 통솔하고, 소수자의 위치를 자각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눈을 뜨게 하거나, 자신의 몸을 버려가며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거나, 앞선 모든 일들이 얽히고설켜 서로를 미워하고 충돌하거나.

  그냥, 그들이 평범한 사람처럼 묘사되고, 그들이 해내는 일이 일반적인 영웅들이 해내는 일처럼 묘사된다는 것이 기쁘다. 사소한 기쁨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큰 의미이다. 그것이 현실이고 그것이 진실이기에, 진실이 감추어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때 가장 기쁠 수밖에. 이 이야기가 노예로 부릴 자들을 분류해 내고, 하등한 것, 일종의 도구로 취급하여 착취해 일군 찬란한 문명의 붕괴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이해하면, 이 이야기의 발칙함이 더욱 기껍게 느껴질 것이다.

 

7

  과학과 연금술과 마법의 순간을 넘나드는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제목 지은 것은, 이 이야기가 분명히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대지에게, 소수자에게, 화합이란 생명에게.

 

8

  책의 두께에 압도당해 읽기를 미루던 과거의 내가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거야? 말도 안 되게 재미있는걸. 언제나 흥미로운 세계를 담은 이야기를 발굴해 내는 건 심장이 뛰는 일이다. 나는 천성이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인데, 소설의 세계에서만큼은 다양한 이야기를 마구 집어삼키는 것이 좋다. 작년에는 주식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렸는데, 올해는 SF 분야에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SF 분야는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경제는... 조금 질렸다). 부서진 대지 시리즈와 같은 대작을 또 찾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SF에 질려 눈을 돌리는 날은 절대 오지 않으리란 예감이 떠오른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SF 소설만 왕창 읽고 집에 쌓아둘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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