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종의 기원

[도서] 종의 기원

정유정 저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5점

  어디서 누구에게 왜 추천받았는지 이미 잊어버린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을 펼쳐든 지 단 이틀 만에 페이지를 전부 해치웠다. 처음에는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을 읽는 것 같아서, 마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메멘토(2001)'를 보는 것 같아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2부부터는 찜찜함이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불쑥 불쑥 찔러 불안했고, 2부 후반부에는 역겨워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3, 4부는 자포자기한 채 문장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고, 이 이야기에 희망이란 없다는 직감만이 내 목덜미를 서늘하게 쓸어내렸다. 에필로그를 몇 번이고 뒤적이며 내가 결말을 잘못 본 게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이렇게 끝을 낼 순 없었다. 이런 게 끝일 리는 없었다.

 

 

  작가의 역량에는 감탄했다. 그를 천재라고 불러야 한다. 일생을 살아가며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마저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데, 세상에 그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부류의 사람을 잡아먹은 것처럼 글을 써내려간 작가가 대단했다. 평범함과 일반적인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을 주인공으로 잡아, 독자에게 그의 생각을 읽도록 하고 그의 행동에 몰입하도록 하는 능력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의 구성에도 감탄했다. 잠긴 기억과 실재하는 현실을 솜씨 좋게 엮어, 한유진이 진실을 가려내기 위해 비틀대는 자취를 독자가 함께 따라가도록 하면서 엄청난 몰입감을 가져다주는 플롯은 너무나 흡입력 있었다. 과거에 대한 회상도, 진실에 대한 조각도, 단 하나 쉽게 내어주는 법 없이 지치기 직전 달콤한 미끼를 던지듯 툭, 툭... 그러다가 다시 현실의 시간이 흐르고, 이내 과거의 시간이 찾아오는 방식의 스토리텔링은 독자들이 주인공의 아리송한 시점에 쉽게 공감하도록 한다. 그래서 너무 재미있었다. 너무나 잘 짜인 추리소설이자 심리소설이었다.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1인칭 소설에서 독자는 주인공의 시점에 취약하다. '나'가 곧 읽은 이가 되고 '나'의 감정과 생각은 곧 읽은 이의 감정과 생각이 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우리는 문장을 넘기며 한유진의 심리와 행동에 동화되고, 그의 변명과 거짓을 매번 쉽게 믿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에 이르러 일순 그의 탈출을 바라 마지않던 내가 정신을 차리고 퍼뜩 느낀 건 불쾌감이었다.

 

  [종의 기원]이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해 책의 맨 뒤편에 적힌 짧은 추천서를 먼저 읽은 탓에 더욱 큰 배신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들 무의식의 폭력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대목에서 나는 괴리감을 느낀다. 자신보다 취약한 사람을 살해 대상으로 삼고, 한밤중에 홀로 걷는 여성을 대상으로 공포심을 조장하며 흥분을 느낀다는 미치광이 살인마의 마음에는 세상이 끝장나도 이입할 수 없을 것이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기를 사냥당하는 입장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읽고 우리 내면의 무의식을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나는 내면의 두려움을 한껏 깊이 들이마셨을 뿐이다.

 

  한유진은 현대 사람들이 여러 가지의 포르노적 놀이에 중독되어 있다고 했는데, 소설 속 여자들의 죽음에 대한 묘사 또한 포르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세하고, 역겹고, 사실적이다. 자신에게 모욕감을 준 여자를 '오뎅'이라 지칭하며 죽음으로 몰아가는 행동이나, 밤마다 여자를 쫓으며 사냥하는 듯한 감각을 되새김질하는 행동의 묘사가 너무 섬세하고 구체적이라 참 힘이 빠졌다.

 

  더군다나, 돌이킬 수 없는 행동에 대한 한유진의 태도는 일관되게 자기 삶에 대한 연민, 자신을 그런 '궁지'로 몰아넣은 사람들에 대한 분노, 선택지가 얼마 없는 상황에 대한 변명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상 그러한 변명을 잘 여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한유진의 행동을 비판한다기엔, 소설이 주인공의 시점을 너무나 공들여 그려놓았다...). 심지어 그러한 변명은 실제 혐오 범죄자들이 실컷 늘어놓은 대사와도 맞닿아 있는데. 2016년 방영되었던 드라마 '시그널'에도 비슷한 사회적 약자 대상 범죄 사건이 여럿 등장했으나, 해당 드라마는 범죄와 서사 사이의 거리를 아주 잘 유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느낌이기만 했어도 참 좋았을 텐데. [종의 기원]은 현실에 여전히 존재하는 이야기를 여과 없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낸 탓에 선을 넘어버린 느낌이다.

 

 

  위의 불쾌감만 어느 정도 걷어낸다면, 책은 아주 재미있었다. 이틀 만에 독파하지 않았다던가. 그런데 책을 읽으며 느끼는 불쾌함은,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 그리고 생존 본능에 깔린 두려움과 불쾌함이 머릿속에 종을 뎅-뎅 울리는 것은 내가 과민반응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래서 비슷하게 재미있게 읽었던 다른 책보다 낮은 별점을 주었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의 추악함을 실감 나게 경험하고 싶다면 추천한다. 그러나 무언가 통쾌함을 느끼거나, 안전함을 느끼고 싶다면 추천하지 않겠다. 주인공이 기적적으로 끝까지 살아나는 것을 보고 희망을 얻는 그런 유의 이야기가, 이 옥탑방에는 통하지 않는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