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부모의 수발을 드는 건 자신인데 환자가 다른 자식들을 더 반기고 챙길 때, 잘 차려입은 형제들이 고생 많다는 형식적인 인사나 하고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갈 때, 다른 자식들 앞에서는 강하고 고상한 척 품위를 지키던 부모가 자기 앞에서만 엄살을 부리고 짜증을 낼 때, 그들의 입에서는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23)
“죽은 부모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나도 내 부모를 그리워하고 싶은데, 보고 싶다고 눈물짓고 싶은데 내 부모는 살아 있고 난 그 사람들이 지긋지긋해. 지긋지긋해서 미치겠어. (41)
”나한텐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게 가족이에요.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이 가족이라고요!“ (194)
나는 오래 전부터 나이 듦에 대해 생각이 많았었다. 울 시어머님의 어머님. 그러니까 시 외할머니께서 104세, 장수하셨는데 그 과정이 3자가 봤을 때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막내에게 재산을 주는 조건으로 함께 사셨는데 막내의 사업이 망하면서, 막내 외삼촌은 미국으로의 이민을 택했고, 그렇게 되자 시 외할머니는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었던 거다. 재산을 받지 않은 자식들은 아무도 그 어른을 모시려 하지 않았고, (사실. 모실 수도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자식들도 모두 노인이 되었다는 사실. ㅠㅠ 노인이 노인을 모시는 구조니 모두가 힘들 수밖에.) 둘째 딸 집에 사셨는데, 딸도 힘드니 결국엔 요양원으로 가셨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의 사랑을 받았지만,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상태. 결국, 104세에 돌아가셨는데 모두 ‘호상’이라며 좋아하셨다.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호상이 되는지, 호상이라는 말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위로의 말 같은 것일까?
이렇게 말하면 너무 개인주의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이라도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내 안에 들어오는 것도 싫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것도 싫어한다. 각자 인생은 각자 알아서. 이게 내 생각인데, 가족은 그 묘한 경계를 아무렇지 않게 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질긴 족쇄, 지긋지긋한 족속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첫 장면은 노부모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어머니는 찹쌀떡이 목에 걸린 채 죽어가고, 아버지는 칼에 찔려 죽어가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죽는 순간까지 자식을 생각하지만 네 명이나 되는 자식 중 누가 더 불효자인지, 그리고 효자인지 답을 내릴 수 없다. 키우는 내내 자랑이었던 자식들은 어느 순간 부모의 뒤통수를 친, 자식이 되고, 부모의 늙고 병듦을 자식들에게는 짐이 되고 만다. 서로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끊을 수 없는 굴레가 끊어지는 건 결국 죽음뿐일까?
가족이라도 결혼하고 출가한 자식들의 삶을 일일이 다 알 수 없고 간섭할 수 없다. 하지만 부모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식에 대해 알고 싶은가 보다. 품 안의 자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품 안에 있었던 아이들이니 궁금할 수도 있겠지만, 그 궁금함이 때론 불편함이 된다는 걸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안다고 해서 부모가 다 해결해 줄 수 없으니까. 곁에 두고 싶어 안달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닐까?
솔직히 지긋지긋한. 에 방점을 찍고 싶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나는 홀 시어머님과 살고 있다. 누군가는 모시고에 방점을 찍을 것이고, 누군가는 얹혀사는 것에 방점을 찍고 싶을 것이다. 어디에 방점을 찍든, 나는 시어머님과 살고 있기에 사람들이 내 앞에서 자신들의 시댁 이야기를 할 때, 뭐든 웃어넘길 자신이 있다. 아무리 힘들다 말해도 여태까지 같이 사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될 테니까. 가족이라는 그 바운더리가 누구보다 지긋지긋한 사람은 나다. 그나마 이십 년 넘게 시어머님과 함께 살다 보니 내 나름의 비책(?)이 있어, 큰 소리 한번 난적 없고, 남편과 주말 부부임에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에게도 이제 시작일, 부모님 돌봄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 과정에서 형제자매끼리 싸울 일이 없길 바란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들 고민하지 않게 내가 먼저 요양원에 들어가겠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노인이 되고 싶다. 가족끼리의 돌봄은 누구 하나 죽어 나가지 않으면 지긋지긋해질 게 뻔하니까. 너무 오래 살아 슬픈 오늘날의 늙음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