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에는 누군가에게 ‘살아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해 본적 없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내 주변에 누군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해 본적이 없었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행복하다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내가 누구 때문에 행복하다 생각하지도 않았다. 가족의 끈끈한 정도 잘 몰랐고, 내가 만드는 가족이 어떤 모습일지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족에 적응하고, 나만의 가족을 만들고 나서 참 많이 변하게 되었다. 나만의 가족만 생각하고, 나만의 가족만 이득이 되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아이들, 세상의 아픔에 조금씩 동참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다큐 프로그램을 보며 아픈 아이들을 보게 되고, 아픈 가족들의 병수발 이야기를 들어도 나는 아파하지 않았었다. 그냥 ‘아프겠구나. 슬프겠구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면, 지금은 그런 프로 자체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아이들, 사랑하기 위해 이룬 가족들. 그 사람들의 아픔이 온몸으로 느껴지고 그 감정에 매몰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부터는 그런 프로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엄마가 아픈 프로를 보면서 나를 대입하게 되고, 아빠가 아픈 이야기를 보면서 내 남편을 생각하게 되고, 아픈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럴 일은 없어야 하지만 혹 우리 아이들이 아프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지금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내가 죽게 된다면 남겨진 우리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두가 아픔이고 눈물이기에 차마 볼 수없는 어미의 마음이 되어 버렸다.
이 책은 휴먼다큐 사랑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 (‘너는 내 운명’, ‘안녕, 아빠’, ‘풀빵엄마’, ‘엄지공주, 엄마가 되고 싶어요’등)의 삶을 소개하고 아픔을 같이 했던 PD가 쓴 책이다. 세상이 각박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넘쳐난다고 하지만 그 안에서 사랑이 그리고 희망이 있음을 그래서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랑PD의 울림이 읽는 내내 아프고 반갑고 눈물이 났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오죽하면 아이들과 남편이 잠든 밤에 읽었을까? 아이들 눈에 울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고, 이렇게 마음이 말랑말랑해진 천상 엄마의 모습이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우는 게 부끄럽기보다 강한 엄마에 대한 아이들의 믿음, 어쩜 그걸 깨고 싶지 않은 나만의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읽는 내내 나의 이런 모습이 감사하기도 했다. 알려고 하지 않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눈에 나는 굉장히 차가운 사람이지만 차가움 뒤에 따스함을 간직하고 있어서 안심했다고나 할까? 어쩜 이것도 내 위안이겠지만...
더 가지지 못한 것뿐 덜 가진 것도 아닌데 왜 ‘더, 더, 더’에만 초점을 맞춰 살아온 것일까. 왜 이룬 것은 보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만 생각한 것일까?
행복하지 않은 것인지 행복하지 못한 것인지.. (43)
“힘든 거요? 참을 수 있어요. 차라리 제가 없어지는 것보다 제가 없어지고 나면 우리 아이들 힘들 거 생각해봐요. 그래서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요. 아프면 안 돼요. 저는.... 엄마잖아요.”(82)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아니 꽤나 여러 번 예측하지 못한 인생의 시련 앞에서 흔들리고 넘어지고 주저앉기 마련이다. 그리고 흔들렸다가도 제자리를 찾고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서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124)
다시금 묻고 싶다. 당신의 그날은 언제인지. 그날의 기억이 어떠하든 평생 잊지 못할 하루를 안고 산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믿기에 당신이 그날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바라며, 나 역시 같은 마음으로 그날을 떠올려본다 (205)
책에는 이슈가 되었던 몇 몇 유명한 이야기도 있지만 우리가 꼭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특히나 가장 창피하고 되풀이 되어선 안 되는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라이베리아의 한국계 혼혈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읽으면서 눈물보다 분노가 떠오른다. 1984년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에 우리나라 대기업 계열의 건설사가 진출하면서 한국계 사생아 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을 마친 생부들이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아이들은 아버지의 얼굴조차 알지 못한 채 그곳에서 가난하게 성장하고 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숨죽여 울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못된 사람보다는 작은 일에 행복하고 이웃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이야기 하고 싶은 건 소소하게라도 보여지는 희망이 증거들 때문 아닐까? 생각해 보니 나는 우리 아이들 덕에, 나의 부모님 덕에, 그리고 나의 남편 덕에 고맙다. 이 세상에 태어나 줘서, 그리고 내 곁에 살아줘서... 고맙다 이야기 하는 나이고 싶다.
엄마 아빠, 내가 효도할 수 있게 살아 계셔줘서 고마워요.
우리 아이들, 태어나 줘서, 엄마의 아이들로 살아줘서 고마워요.
내 남편. 내 곁에 무한한 힘이 되는, 내 남편 살아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