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나 뉴스에서 흉악한 범죄를 접하게 되면 생각하게 된다. 저 사람도 혹... 누군가의 엄마나 아버지는 아닐까? 누군가의 따스한 부모님 이었을 텐데... 하지만 혹 누군가에게 잔혹한 사람 아니었을까? 나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가정을 차가운 길바닥에 내 던지는 매몰찬 사람은 아니었을까?
일가족이 살해 되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채 살해 되었다. 수학여행을 떠났던 그 집의 딸 가나토만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마음 속에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시간이 흘러 가나토는 스무 살이 되었고,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한 범인에게도 자신과 같은 또래의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미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녀 역시 자신과 똑같이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나토는 과연 미호를... 용서할 수 있을까?
‘고통 받아가며 살려져 있다.’ 살인범의 딸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아버지가 사형으로 죗값을 치르면 자신도 드디어 해방되어 다음 인생에 발을 내딛을 수 있다. 그렇게 결론 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차라리 교수대에 오르는 아버지를 뒤따라 죽고 싶다, 아버지가 처형된다 해도 계속될 이 고통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 이것이 그녀의 본심은 아닐까? 나와 닮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182)
자신의 8년과 미호의 8년은 흡사 마주한 거울 같다. 길이와 각도만 다를 뿐, 상처의 깊이는 똑같이 느껴졌다.(309)
살인을 사건의 해결책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론... 살인을 사건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듯이, 착하고 순한 사람도 궁지에 몰리면, 악한 마음을 가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사랑하는 부인이 죽고, 사망 보험금으로 받은 돈을 누군가에 의해 빼앗기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면서 알맹이는 쏙 빼어가는 사람. 누군가에게는 따스하고 멋진 아버지이고, 누군가에게는 멋진 남편이라는 가면을 쓴 사람.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자 누군가의 가정은 헌 신짝처럼 내 던진 사람. 그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살인으로 죽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죽었고, 누군가에게 엄마를, 동생을 빼앗아 갔다. 또 누군가를 살인자의 딸로 살게 만들었고, 누군가를 가해자의 딸로 만들어 잊을 만하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했다. 이들에게 용서란 단어가 숨어들 공간이 있기나 할까?
우리는 모른다. 그 두 사람의 입장을. 다만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짐작하는 마음이 맞기나 할까? 그들의 삶의 무게, 그들이 가진 삶의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밑그림일 것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아팠다.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생각, 남들과 다른 사랑을 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자신을 파괴해야 한다는 생각.. 너무 복잡하고 무섭다. 그들의 고통이 얼마만큼 클지 몰라서 더 아팠다. 누구도 그들에게 서로를 용서하라 말 할 수 없다. 하지만 가나토는 느낀다. 미호도 자신과 똑같이 고통스럽고 아팠구나... 하는.
그들 곁에서 누구도 따스하게 위로할 수 없고, 누구도 충고 할 수 없었던 현실이 두 사람을 자석처럼 끌어 들였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딸이라는 낙인. 그 둘은 그래서 더욱 끌렸을지 모르겠다. 책을 덮고 이 무거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묵직한 슬픔. 묵직한 아픔. 어떤 사건이든 가십처럼 흥미위주로 사건을 이야기 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런 말들이 이 사회로 진입(?)하려는 그들을 다른 장벽으로 밀어 넣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