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유난히 불편한 책이 있다. 그 불편함의 종류가 진실이지만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미치는 파장의 정도가 클 경우 우리는 보통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거북하니까, 나는 아니니까, 우리 가족이랑은 거리가 먼 경우니까.. 우린 그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 싫어 외면했기에 더 큰 화를, 더 큰 아픔을 만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천운영 작가의 책을 처음 만났다. 블로그를 하면서 작가의 이름 석 자는 알고 있었고, 그녀의 대표작 정도도 알고 있었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왜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명확하게 답할 수 없을 정도로 그냥... 손지 가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러다 우연히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결코 쉬운 이야기도, 편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이 책을 잡는 순간 끝까지 읽지 않는다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에 사로 잡혔다.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늘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고문, 그리고 빨갱이, 00사범..
그래서 누군가를 검색했다. 우리나라의 00기술자로 이름을 날린 그 사람. 10여년의 도피생활을 마치고, 자수 7년의 복역 후 출소하여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책은... 꼭 그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진 않지만 행적을 따라가 보면 그 사람이다. 처음엔 마냥 그 사람을 욕하고 싶었다. 어떻게 같은 사람끼리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너는 사람도 아니냐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 너 때문에 죽어가고 아파하고 너 때문에 거짓 진술을 했던 많은 사람들. 너는 누구를 위해 일했던 개였냐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 아무리 기술자가 대우 받던 세상이라지만 정말 이런 걸로 기술자(?)가 되고 싶었냐고, 옆에 있었다면 침이라고 뱉어주고 싶었다. 사람의 몸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가능하다는 고문 기술자. 고문도 예술적(?)으로 했다는 사람.
조직이 필요한 것이 혹시 희생양이 아닐까?
나는 의심을 품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사는 세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조직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104)
저것은 내 아빠가 아니다. 저것은 짐승이다. 침을 질질 흘리며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성난 짐승이다 아니다 저것은 짐승이 잡아다놓은 썩은 고기다. (176)
몸의 통증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라디오 소리. 나는 눈물을 흘리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너무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봄비에 젖은 나뭇잎을 얘기하는 그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참을 수 없었다. 저희들끼리 웃고 떠들고, 나와는 상관없이 너무나 한가롭고 평화롭게 돌아가고 있는 저쪽 세상이 더 무서웠다. (187)
발이 하나 잘려나가면 그 잘에 새로운 발이 생겨나는 게 불가사리야. 발이 썩으면 발을 잘라내면 되고 손이 썩으면 손도 잘라내면 되고 가끔은 말이야 일부러 발을 잘라내기도 해 새발이 필요할 때는 말이야. 나도. 내 윗사람도 그 윗사람도 예전에 끝났어. (222)
정권이 바뀌면서 고문기술자 안은 조직에서 당분간 숨어 있으라는 명을 받는다. 절대 연락도 하지 말고.. 도피 생활이 시작된 안에게 마지막 찾게 된 곳은 아내와 딸이 있는 미용실. 그 위의 다락방. 그에게는 사랑스러운 딸이 있었다. 딸이 대학 생활을 시작할 무렵 신문에 대대적으로 아빠의 얼굴이 나오고 그녀의 삶도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다락방에 숨어든 아빠를 바라보는 딸. 딸의 주변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빠를 찾으려 혈안이 된 기자와 고문 피해자들. 친구도, 사랑도 남지 않았다. 언젠가는 조직에서 다시 자신을 찾아 줄 거라 믿었던 안은 다락방 생활을 하면서 서서히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의 조직이 허물어졌고 그 조직에 다른 사람이 올라앉게 되었다는 것을....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한 사람의 입장을 덜 대변했다고 이야기 할지도 모르겠다. 다 읽고 나서 나는... 이 사람도 이 사회, 대한민국이라는 조직의 희생양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사람들에게 고문을 행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다고 믿고 싶다. 만약 고문을 하면서 희열을 느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일 테니까. 정말 단죄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사회에 보호를 받고 건재한 세상.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서 였을까? 우리에겐 청산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그들은 누구보다 부자로 잘 살고 있으니... 이들도 나라라는 이름, 한국이라는 조직 틀 안의 가장 말단. 조직원(?)은 아니었을까? 더럽고 피를 보는 일은 늘 말단, 힘없는 누군가가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의 인터뷰를 읽었다. 자신의 지난 행적을 이제야 반성하게 되었다고. 처음에는 나라가 원했기에 자신이 하는 일이 애국인줄 알았다고 생각한 사람. 그 조직의 윗대가리(?)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조직의 허망함을 알고 나서.. 그때서야 반성하게 되었을까? 나는 그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모른다. 하지만 너무 늦게 반성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로 인해, 그들의 조직(?)으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피를 봤고, 아픔을 봤으니까.
김치를 먹을 때 생강은 골라내고 싶어지는 음식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 당시 시대가 원했던 양념 같은 존재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익은 김치를 먹으려고 보니 신경 쓰이고 빼고 싶은 그런 존재. 그런 양념... 남영동이라는 영화를 보진 않았다. 하지만.. 이 책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내 마음이, 내 생각이.. 불편하지만 알아야 하는 진실. 허한 바람이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