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우연일까? 최근에 읽은 책들이 중학생 아이들의 왕따 문제를 소재로 한 것이 좀 있었다. 왕따가 우리 사회의 문제로 부각되면서 왕따를 집중 조명하는 책들이 많다. 지난번에 읽었던 ‘십자가’라는 책은 자살한 아이의 유서에 절친이라 적힌 아이의 입장에서 왕따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글을 썼다면, 이 책은 왕따 가해자의 부모 입장에서, 그 부모들 시선에서 왕따를 바라본 책이다. 두껍지도 않고 글씨가 작지도 않다. 사건에 대한 설명이 친절하지도 자세하지도 않지만 왕따를 바라보는 가해자 부모의 심리를 간결하면서도 깔끔하게 잘 표현했다고 하면 맞는 표현일까?
유명 사립 여중학교에서 한 아이가 자살을 했다. 죽은 아이의 유서가 발견되면서 유서에 적힌 아이들 부모가 학교에 모인다. 학부모들은 말한다. 우리 아이는.. 우리 아이는 결코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학교의 명예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학부모 한 명을 유서를 태우게 되고 유서는 없는 거라 말하게 되는데... 하지만 자살한 아이는 유서를 한 명에게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유서가 더 나타나고, 발뺌하던 학부모들은 하나 둘 사건의 진상을 말하기 시작하는데...
“아이가 잘못하면 부모가 혼내야지요. 네가 한 행동은 나쁜 짓이라고 가르쳐야지요. 죗값은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누구든 제 자식은 예쁜 법이지,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언제 어떻게 책임을 집니까?”
“다섯 명이 친구를 괴롭히고 돈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매춘을 시키고 죽인 게 돼요. 아십니까? 이걸 어떻게 인정하게 합니까? 어떻게 반성하게 해요? 어떻게 보상하라고 하느냔 말입니다. 대체 뭘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우란 겁니까?” (116)
이 책을 읽으면서 ‘디너’라는 책이 생각났다. 그 책은 왕따가 주제는 아니었으나 아들의 범죄를 덮으려는 부모의 이야기였기에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 책도 그 책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죽은 아이가 남긴 유서를 불태우면서 이러면 증거는 없고 흔적도 없어진다고 말하는 학부모, 학교의 전통이 어떤 건데 이런 일(?)로 학교의 위상을 실추 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학부모, 사건의 진상을 알면서도 무조건 침묵하라 시킨 학부모. 인정하면 끝장이라고 말하는 학부모. 이런 사람들이 과연 부모 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일까?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에게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현직 교사 신분의 학부모였다. 생각해본다. 왕따를 인정하고 반성의 기회를 갖는 아이가 괜찮을까? 아님 무조건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이에게 괜찮을까? 분명 어떤 경우든 가해자 학생도 상처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고 나서 반성하지 않았던 아이의 심리적 부담감이 더 크지 않을까?
줄곧 궁금했거든요. 걔들 부모는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 (103)
이런 사건이 터지면 제일 궁금해 하는 것 중 하나가 아닐까? 모든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 나도 학부모이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입장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제 초등학생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런 책을 읽으면 답답하고 가슴 아프다. 학부모들에게 자기 자식은 누구보다 소중하다. 하지만 나의 아이가 소중하다면 남의 아이도 소중할 것이다. 나만 아니면 되고, 우리 아이는 아닐 거라는 생각. 이것만큼 이기적이고 무서운 생각은 없는 같다. 아이들 때문에 학부모들을 만나게 되는 일이 있다. 학교 행사에 거의 참석하진 않지만 1년에 한 번 새 학기 총회 때는 가끔 얼굴을 내밀게 되는데 그때 학부모들을 만나게 되면 유난히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다. 자기의 아이 허물을 결코 보려고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어떤 왕따 사건에 자신의 아이가 주동자로 연루가 되면 일단 화부터 낸다. 우리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고 00이를 만나 최근에 이상해 진 거라고... 하지만 그 아이의 소문은 그 전부터 있어왔다는 것... 부모만 모르고 다른 아이들은 다 아는 진실이 되고 만다.
맨 마지막... 현직 교사 부부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아니... 이기적이다.
“빈소에 갈 거야?”
“안 가.”
“이상해?”
“이상하지 않아. 살아야 하니까.”
“그렇군”
“살아야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