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주제는 아니지만 황정은 작가의 책을 좋아한다. 그것도 장편소설을. 황정은 작가의 단편은... 단 한 번도 쉽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단편 소설집을 읽을까 말까 고민했었다. 읽었다고 해서 명쾌하지 않고, 읽었다고 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없고, 읽었다고 해서 큰 깨달음이 나에게 오지도 않으니까. 읽고 나면 그러니까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걸 고민하고 생각하느라 늘 머리가 아팠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정은’이란 이름만 보고 구입해서 읽는 것을 보면 그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즐거움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모두 8편의 단편. 사실 쉬운 건 하나도 없고, 줄거리를 요약하기도 힘든 이 단편들. 그래도 기억에 남는 단편들이 있다는 것이 좋다.
오제와 함께 시골에서 고추를 따고 서울로 올라오는 이야기 ‘上行’, 지하 서점에서 일하는 ‘나’가 실종된 소녀의 목격담을 이야기하는 ‘양의 미래’, 한때 연인이었던 제희네 가족과 수목원에 간 날을 떠올리는 이야기 ‘상류엔 맹금류’, 실리의 이야기를 쓰고자 하지만 그 이야기를 쓰자니 자신의 맨 얼굴과 만나야 하는 ‘명실’, 이상한 소음에 시달리는 이야기 ‘누가’, 외환위기에 바르샤바로 여행을 떠나는 부부의 이야기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오랫동안 나는 그 일을 생각해왔다”로 시작하여 “오랫동안 나는 그것을 생각해왔다”로 끝맺는 소설 ‘웃는 남자’, 서비스직의 감정노동 문제를 말하는 ‘복경’
어느 한 쉬운 소설이 하나도 없다. 다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나마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복경’이라는 단편이다. 웃고 싶지 않지만 매일 웃는 사람.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매일 웃는 사람이라고 답하는 사람. 백화점에서 이불을 판매하는 여자는 매일 웃는다. 웃지 않으면 안 된다. 기분이 나빠도 웃어야 한다. 기계적으로 웃을 수밖에 없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슬퍼진다. 그녀는 웃고 있다 말하는데 읽는 나는 슬프다. 억지로 웃다보니 웃는 얼굴이 되어 버린 사람. ‘우리 매장에서 난리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야. 사과가 필요하다면 죄송합니다. 고객님으로 충분하잖아? 그런데 그렇게 해도 만족하지 않지. 더 난리지. 실은 이게 필요하니까. 필요하고 바라는 것은 이 자세 자체. 어디나 그래 자기야 모두 이것을 바란다. 꿇으라면 꿇는 존재가 있는 세계. 압도적인 우위로 인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인간으로의 경험. 모두가 이것을 바라니까 이것은 필요해 모두에게. (중략) 게다가 자기야. 나는 무시당하는 쪽도 나쁘다고 생각해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지 존귀한 사람은 아무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나 진정으로 당하는 거야 무시를.. (201~202)
백화점에서 갑질하는 진상 손님에 대한 이야기가 간혹 뉴스를 장식한다. 그들이 판매원들에게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시당했다는 생각 때문일까? 대접을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인격이 아닌 돈이 우선이 되는 세상. 목소리가 크고 진상을 떨면 뭐든 이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 내가 그 상황이 된다고 반대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진상 짓을 하게 될까? 판매하시는 분들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스스로 웃는 인간이라고 말하는 이 단편은 서글프면서도 섬뜩하다. 눈은 웃고 있지 않지만 입만 팽팽하게 웃는 것. 감정 노동자들이 심리를 잘 표현한 것 같아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