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포스트 민주주의

[도서] 포스트 민주주의

콜린 크라우치 저/이한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이럴 줄 몰랐다'는 변명을 멈추기에 딱 좋은 때다. 이 종(鐘)이 누구를 위해 하루하루 더 크게 울리고 있는지 묻기에 더없이 좋은 때다."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135쪽, 동녘 刊

 

조금씩조금씩, 그러나 끊임없이, 눈에 띄지 않고 야금야금 저항에 부딪치지 않을 속도로 민주주의는 부식되어 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의 정치적 정체성을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이것은 인간 보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편으로 이념화한 것이며, 지난 20C에 이르는 시민들의 피로 얼룩진 역사 위에 가까스로 획득한 모든 인간의 차별없는 존엄을 지키기위한 요소들 - 국민주권에 따른 보통, 평등 , 직접선거를 비롯해 기본적 인권의 보장, 평등을 근간으로 하는 법치주의 등 - 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 시민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 요소들의 실질적 내용에 왜곡, 변질, 훼손이  점증하며,  인간적 삶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적 환경을 이해하는 것은 자기 삶의 주체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인간인 이상 외면할 수도 없는 '삶의 행위 자체'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삶의 환경에 변질이 오기 시작하면 동시에 우리네 삶 또한 변화를 강요 받게된다.  마침인 듯 코로나19의 충격은 사람들에게 세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하는, 즉  불평등 양상의 첨예화로 대변되는 사회적 양태를 초래한 근인(根因)들을 사유할 수 있는 전환의 시기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경고처럼 바로 지금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힘들에 제동을 걸고, 훼손되고 있는 사람다운 삶의 환경을 복원하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영국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이러한 상황에 - 민주주의 요소들의 훼손 - 이른 오늘의 민주주의를  '포스트(Post)민주주의'라 명명하고 있다. 비민주주의가 아니라 포스트민주주의라 한 것은 그 질적(실질적 내용) 손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통선거의 투표와 같은 외형적 민주주의의 형식적 요소들은 잔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정점을 찍은 후 하강하면서 최대민주주의에서 멀어질수록 민주주의 요소들이 파괴되는 포물선에 비유하며, 이 하강을 저지할 방안을 모색한다. 다만 되돌려 다시 '정점'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은닉되어 있다고 여겨지는데, 자본주의라는 완고한 체제를 수정 불능이라는 넘어서지 못할 장벽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파괴의 힘을 저지하고 질적 손상을 회복 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의 이해로 견인한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돌진과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 47쪽에서

 

Ⅰ.  민주주의를 퇴락시키는 주요 원인들(1) - 경제적 세계화, 공기업 민영화, 미디어 공공지배

 

민주주의를 추락시키는 원인이 어느 하나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임은 물론이다.  콜린 크라우치는 이들 원인으로 경제적 세계화, 공기업의 민영화, 시민계급 대표의 상실, 미디어의 공공지배, 정치의 스펙터클화를 지적하며,  이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개별 국가의 통치능력 넘어서까지 성장한 초국적 기업의 출현, '경제적 세계화'로 호명한다.  이들 거대 자본이 '제도 설립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직접적인 법률 제정자는 아니지만 규제, 세금, 노동환경이 싫으면 떠나겠다고 국가정부를 위협하고 자기 이익을 실현한다.  시민 삶을 담보로 잡힌 정부는 노동 유연성의 강화 , 재정 지원, 각종 규제의 완화로 끌려간다.  정작 해당 공동체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않는 다국적 자본이 공동체의 구성원인 시민적 삶의 요구에 반하는 권력 주체가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일례로 구글의 한국 매출액도 알지 못하는 현상처럼 세금 징수의 왜곡을 낳고 이는 다시금 분배를 비정상화시킨다. 불평등을 출산하는 출발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버금가는 민주주의 파괴라는 긴장을 야기하는 사태가 공기업의 민영화다. 공공사업과 복지국가의 실현은 민주주의 달성의 근본적인 부분이다. 공공사업은 누구나 접근 가능한 보편적 권리로서 '사회적 시민권'을 이루는 중대한 축이다. 즉 시장의 경쟁과 이윤 추구로부터 거리를 둬야하는, 해당 서비스가 시장을 통해 제공되면 시민권(시민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분배의 정의를 왜곡시키기에 효율성의 차원을 초월하여 실행하여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이 크고 수요도 널리 존재하는 공공 서비스들에 시장화 또는 상업화의 그림자가 덮치고 있다.

 

폭설로 인한 전력 공급의 차단으로 시민 삶에 막대한 고통을 안긴 근간의 미국 텍사스주 사례처럼 전력사업을 민영화했을 때 고액의 전기료는 물론 서비스 질의 하락, 공공 질서에 대한 무책임성 등 그 손실을 시민이 모두 부담해야 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민간자본은 이익만 향유하고 손실은 전가되는, 그 불평등의 심화는 직접적이다.  민영화에 따른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사업이 정부에서 민간자본으로 이전 됨에따라 정부에 당해 전문가가 사라져 정부의 전문성이 상실되고, 이는 다시금 정부가 민간에 의존해야하는 역설을 낳는다.  특히 민영화는 특권적인 정치적 접근성을 가진 특별한 기업가계급을 만들어낸다. 결국 민영화하면 사업이 효율화되고 부패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은 오히려 부패의 증가와 공공의 이익을 자본에게 몰아주는 부정직한 현상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시민의 평등적 접근을 차단하는 악질적인, 가장 질 나쁜 민주주의 요소 파괴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는 기업자본에 정치적 영향력을 몰아 준, 다시 말해 극소수의 수중에 자본축적의 우월한 기회와 권력을 가진 미디어(신문, 방송 등 매체)권력의 행태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읽을 수 있다.  미디어를 소유한 기업자본이 공공을 지배하는 것인데, 특정한 정치적 관점을 공유하는 소수의 거대자본이  자기 이익이라는 관점 관철을 위해 매우 강력한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극단적 단순화, 감각적 선정성과 같은 상업적 기법을 통해 "정치적 의사소통의 기초를 파괴하고 시민 능력을 저하시켜 민주주의를 병약화 시킨다"는 점이다.  일례로 조중동 세 황색신문은 일제히 존재하지도 않는 대통령의 레임덕 기사로 헤드라인을 꾸며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고 시민 여론을 왜곡 유인하는 행태는 민주주의 훼손의 그 전형이라 할 것이다. 

 

이들 황색신문은 언론의 자유를 말하며,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여기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분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정치적 결과에 영향을 받고 미치는 데 대체로 평등한 능력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요구한다. 이와달리 자유주의는 정치적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일에 자유롭고 광범위한 기회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일례로 불평등을 감소시키기 위해 기업자본에 각종 규제와 규칙을 통해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고 정치적 평등 기준을 높이려는 민주주의에 대해 자유주의는 규제를 풀어 자본의 자유로운 축적 행위를 방해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상호 긴장관계에 있는 서로 다른 두 개념이지 단지 수식상 붙어다닌다고 해서 동일 개념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릇된 이해이다. 자유주의는 수시로 민주주의를 손상시킨다. 이 둘의 적절한 균형은 사실 딜레마에 가까운 것이기에 시민의 감시가 떠나는 순간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망령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한다. 

 

"정체성 형성에 실패한 정당은 정책적 의제보다 정당간 다툼을 가장 두드러진 정치 이슈로 만들어 시민의 정치적 능력을 저하시킨다."  - 112쪽에서

 

Ⅱ.  민주주의를 퇴락시키는 주요 원인들(2) -  정치 스펙터클화, 시민 계급 대표의 상실

 

한국의 정치사회가 광범위한 시민참여나 기업자본 바깥의 조직들에 대해서는 적의를 뿜어대던 오랜 수구집단의 지배를 벗어난지 이제 4년 되었다.   능란한 조작(공작)정치 기술에 전문가가 된 수구 집단의 오랜 정치는 환멸에 가까운 것이었고,  시민 대중은 수동적이고 심지어 냉담한 역할을 할 뿐이었다. 이 러한 상황에서 형식적 민주주의 유지를 위해 이 집단이 구사한 것이 이른바 정치의 스텍터클화라 할 수 있다한국의 민주주의는 고작 대중 참여의 주된 양식으로서 치러지는 선거에 불과했기에 이는 민주주의를 선전하는 요긴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화려하고 대규모적인 쇼비즈니스를 모방한 선거 조차 통제된 스펙터클, 즉 선거의 공적 논쟁이 치밀한 흑색선전(matador)으로 도배되어 정책 대결이 아닌 중상모략과 교란으로 민주주의를 조롱하고, 호화로운 구경거리로 호도시켜 이들이 만들어 놓은 게임의 신호에 반응하는 것이 선거 결과인 양상을 초래했다. 이것을 비로소 뒤집은 것이 2016년 거대한 시민이 물결을 이룬 개방된 스펙터클로서 촛불시위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적지않다. 미국의 사회학자 '필립 슈미터'는 "광장의 시민이 권력을 쫓아내기는 커녕 권력을 잡은 건 또 다른 정치세력일 뿐이며,  소수의 권력자가 통치하는 체제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진정한 정치혁명은 아니라는 관점을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대변하는 계층이 자본 소득계급이 아닌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민 노동계급으로 부분적으로 변화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오늘, 마치 기업자본과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하던 정치배들이 언제그랬더냐는 듯이 다시금 포퓰리즘에 의탁해 전체주의적 야망을 은폐한 채  정치인의 일상을 감시하고, 불평을 확산시키며, 남 탓만 하는 것이 정치인 듯 무의미한 탐색전으로 추락시켜 시민의 삶을 위한 본연의 정치를 실종시키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4년 내내 여당 정치인들의 정직성만이 이 사회의 주요 정치 현안인 것처럼 왜곡시켜 정치를 군사정권 시절의 저열하고 폭력적인 수준으로 되돌려 놓으려 하고 있다.  시민이 각성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터이다. 

 

이 지점에서 너무도 중요한 것이 정치 권력에게 영향력을 행사 할 시민의 의지를 대표할 조직이 흐릿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노동단체가 상당한 시민집단의 삶을 대표하여 정치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지만 점차 이들 계층의 수는 중대하고도 역전 불가능할 정도로 감소하고 있다. 반면 아주 이질적인 구성원으로 이뤄진 계층들로 분산되어 기존의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계급 대변의 목소리를 지니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컨시어지( concierge)노동이나 클라우드(cloud)노동과 같은 비임금 노동자의 비상할 정도의 증가와 이도저도 아닌 관리직, 사무직, 판매직, 금융직 등으로 분류되는 뒤죽박죽의 계층들이 혼합되어 그 이해관계가 제각기 달라 일관되고 보편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 부상(浮上)이다. 

 

이러한 정치적 영향력 집단 부재의 빈틈은 정책적 쟁점이 되어야 할 과제의 선택에 있어서 시민적 삶을 위한 과제가 소외된다는 의미이며,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자본 권력의 영향력이다. 자본은 정치인들에게 직간접적인 이해관계를 나누며 소위 시장 또는 상업이라 불리는 것이 인간사 모두를 지배하는 형국으로 이전되어 간다. 마치 시장이 목적이란 듯이,  인간의 복지를 위한,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해야 할 것이 절대적 원리 행세를 하게 된다. 이때 정치와 자본의 친화는 민주주의 파괴의 결정적 요소로 작동한다.

 

다시 공기업, 공공사업의 민영화가 목소리를 높이고, 각종 제도는 기업자본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대기업 감세와 줄어 든 세원(稅源)은 노동자의 소득세 감면 항목의 삭제, 최저 임금의 억제, 노동의 유연화 등으로 수구 정치 집단이 당위성을 선전할 것이다. 저항하는 사람은 빨갱이로 낙인을 찍고, 민주주의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할 것이다. 2009년 용산철거민에 방망이를 치켜 세우고 집단 살인을 자행한 무참한 폭력 사태는 수구 정치 권력이 시민에게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일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제2 기계시대라는 오늘의 시간은 그야말로 거센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자본주의에 깊게 포섭된 지금, 유휴 노동력의 양산이라는 현실은 사람들의 생존적 미래를 불안정하게 하고 있으며, 거대 자본은 국경을 초월하여 제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본 축적의 동력을 가속화하고 있다또한 새로운 노동 계층의 출현과 중간 계층의 계급적 분별이 모호해지는 것과 함께 이들이 단일의 목소리를 내기에는 계층간의 유대가 이뤄질만한 시간이 없었기에  상대할 계급이 형성되지 않아 정치 권력은 기존의 관행적 행위 습관과 새로운 상황에 대한 방향 설정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듯하다.  종(鐘)이 울리고 있다. 시민들이여, 이럴 때가 아니라고!

 

"민주주의가 쇠락하게 된 근본 원인은 바로 기업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과 나머지 모든 집단 사이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힘의 불균형이다. (...) 정치가 민주주의 이전 시대의 폐쇄된 정치권력과 기업자본가들의 일이 되어가고 있다". -  173쪽에서

 

Ⅲ.  어디로 갈 것인가?

 

콜린 크라우치는 이같은 민주주의 퇴락을 저지하기 위한 실천 가능 방안을 세 가지수준에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기업자본의 커져가는 지배력을 제어하는 정책의 마련이며, 둘째는 정치 관행 자체를 개혁하는 것이고, 셋째는 현상을 바꾸는 데 관심있는 시민들이 직접 할 수 있는 행동을 들고있다. 

 

우선 기업자본의 지배력을 축소시키는 방안은 현대의 기업들이 끊임없는 변이를 하고 있음에도 바뀌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리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업자산의 소유주는 거의 바뀌지 않거나 동일인이라는 점이며,  바로 불평등 심화의 중심인 이 소유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제도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주권자로서의 시민이 정치에 요구하여야 할 것은 눈 앞의 푼 돈을 위한 악다구니가 아니라,  시민 모두의 삶을 구조적으로 안정화 할 수 있는 거시적 안목인 것이다.  한편 공공부문에 침투하는 민간부문의 차단을 비롯한 신자유주의의 자유시장 규칙이라는 망상적인 신화를 거부해야 한다는 점이다. 공무원이 기업으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처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충돌에서 우리사회가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도 중대한 시민적 합의를 요구한다.  혼탁과 부패로 이어지고 궁극에는 시민 삶의 질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는 요소들에 대한 과감한 개혁이 요구되는 것이다.  

 

필립 슈미터를 다시 소환해야 할 것 같다. 이와 같은 제도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당사자는 결국에는 정당 정치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오랜 관행, 자본 친화적이며 기득권자들이라는 점이기에 시민 대중의 요구가 순수하게 관철될 것이라는 이해는 순진하고도 낭만적인 발상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거 결과에 비례하여 정부가 정당에 지급하는 정치 자금의 할당을 직접민주주의적인 접근법으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한다.  "모든 시민의 연도별 과세액중 동일한 소정의 금액을 시민이 직접 선택한 정당에 할당"하자는 것이다. 시민이 정당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권자로 행위함으로써 정당 정치 권력의 관심 이탈을 어느 정도는 제약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정치권력이 자신들의 합의로 만든 정치자금 할당 규칙을 시민의 규칙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나아가 무작위로 선출하는 민회를 통해 자기들만의 리그전을 벌이는 기존의 권력을 견제하는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 모두 가능한 것이지만 이것이 입법화되기 위해서는 기존 정치 권력이 이를 실천하도록 하게 만드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콜린 크라우치는 "일반적이며 광범위하게 사회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새로운 시민 조직이 출현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의 노동단체나 시민단체는 자기 계급이나 계층의 이익을 위한 조직이며,  그나마 이들 기성 조직은 더 이상 오늘의 시민 대중을 위한 입이 되지 못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한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사회단체에 대한 보조금 역시 시민들의 직접 선택에 의한 할당이 되어야 하며, 새로운 시민 조직은 변화된 시민 계층의 목소리를 지닐 수 있는 정체성을 형성, 확립하여야 한다. 이제  모든 시민들은 아웃사이더로서 정치 바깥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삶의 주체로서 소란스럽고 명확한 요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여야 한다. 우리 시민 대중들은 평등주의적 민주주의를 향해 새로운 전복적 창조성이라는 가능성을 위해 연대하여야 한다. 

 

기성 정치 세력은 이러한 창의적 말썽에 반민주적 무리라는 꼬리표를 붙이려 할 것이지만, 이들  "정치 계급이 통제하는 기제 안에서만 움직이는 집단만이 민주적이라는 표현만큼 반민주적인 것"은 없으리라는 것이다. 자본도 끊임없이 정치 권력, 국가와 타협한다. 새로운 시민 조직은 기성의 정치 조직들, 사회단체들을 통해 영향력을 확장하여야 한다. 그리고 기성 정당 정치권력들에게도 직접적인 접근의 기회를 늘려가야 한다. 이 모든 행위의 실천은 무수한 어려움을 겪게 될 터이지만 2021년, 오늘의 지구촌은 그리 많은 시간을 지니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모든 곤란은 함께 몰려온다. 전체주의화, 인간노동 없는 생산의 세계, 자본 지배력의 확장, 더 이상 필요 없는 인간 재료들이 양산되는 세계가.  단지 기본소득이라는 하나의 합의에 있어서도 정치권력은 자기 이해관계에 따른 헤게모니 싸움으로 변질시켜버리기 일쑤이지 않은가? 쇠락하는 민주주의를 되살릴 섬세하고 치열한 사유로 가득한 저술이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