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가 클래식과 재즈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작품 속에 담아내기에 하루키 마니아들은 그의 작품 속의 음악을 찾아 듣는다. 하루키 마니아는 아니지만, 그가 작품에 담을 만큼 애장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궁금해 찾아 들었기에 하루키가 소장한 클래식 음반을 담았다는 이 책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를 펼치는 순간 단순히 좋아하는 것과 깊이 있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책보다 레코드에 집착한다는 하루키는 60년 가까이 레코드를 모았다고 한다. 재즈를 더 선호하기에 클래식 음반은 맘에 드는 재즈 음반이 없으면 차선으로 구매한 것이지 특별한 체계를 가지고 수집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클래식 레코드 재킷 디자인이 매력적인 것에 끌려 소장하게 된 경우들이 많다고 한다. 내가 클래식 음반을 모을 당시만 해도 CD를 더 쉽게 구매할 수 있었고 재킷 디자인도 그다지 특별한 음반은 없었다. 이 책에 소개된 오래된 LP의 재킷 디자인을 보면서 첫 느낌은 이게 클래식 음반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색다른 디자인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 책은 대략 100곡가량의 클래식 곡 중 하루키가 소개하고 싶은 레코드에 대한 문학적 감상과 해석을 담아낸 오래된 클래식 앨범의 카탈로그라 생각된다. 그의 글을 읽을수록 좋아하는 음악을 이렇게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낸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같은 곡을 연주자, 지휘자 그리고 녹음 연도에 따라 디테일하게 차이점을 느끼고 또 문학적 감상을 읽다 보면 그냥 단순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넘어서 전문가 수준 이상의 감상자임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런 흐름으로 새삼스레 굴다의 연주를 들어보면 '아, 역시 빈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무릎을 친다). 굴다하면 아무래도 '좀 별난 사람'이라는 인상이 있는데, 이 레코드에 귀기울이고 있으면 마치 오사카의 우동집에서 스우동을 먹는 것처럼 신기하게 안심이 된다. 특별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재료를 넣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모차르트를 대수롭지 않게, 조금 은 멋을 부리며 연주한다. [3.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5번 C장조 K.503 중 p.23~23]
루돌프 제르킨의 연주는 리흐테르와 반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솔직하다고 할까, 소박함 그 자체다. 리흐테르의 예리한 기교도 없고, 루빈스타인의 화려함과 여유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뼈를 깎는 듯한 운지가 이상하게 듣는 이의 마음을 자극한다. 이 장대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질리지 않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마 그 성실함이 듣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제르 퀸의 B 플랫 장조를 제대로 감상하기에는 나름대로 에너지가 필요하다. [51-2 슈베르트 피아노소나타 21번 B 플랫 장조 D.960(유작) 중 p.185~186]
뉴욕 태생의 린 하렐은 (당시) 한창 띄워주던 '신세대' 첼리스트로,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청신한 연주를 들려준다. 그의 첼로는 위대한 선인들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노래한다. 소리가 깊고 선명하지만 중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중량을 줄인 스포츠카처럼 악기가 기민하게 움직이며, 경쾌한 퍼포먼스를 기분 좋게 펼친다. 창을 활짝 열고 신선한 바깥공기를 들이켜는 듯한 상쾌함이 느껴진다. 슈만의 곡이 어느 때보다 약동감 있게 들린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가 뛰어난 건 알겠는데 너무 웅장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쪽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81 슈만 첼로협주곡 A단조 작품번호 129 중 p.291]
오래된 클래식 음반의 재킷 디자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웠고 특별한 체계없이 수집하게 된 음반이라고 하지만 음반 하나하나에 담긴 하루키의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지금보다 60~70년 가까이 앞서 발매된 음반들이기에 생소한 연주자와 지휘자들의 이름도 눈에 띄었고 유명 작곡가의 곡이라도 새롭게 귀에 들어오는 곡들도 많았다. 같은 곡을 연주자, 지휘자 그리고 음반 녹음 시기에 따라 저마다의 색을 하루키의 감성으로 해석한 것이니 나도 음악을 감상하며 그 느낌을 글로 써내는 기록을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순서를 따라 읽지 않고 원하는 곡에 대해 펼쳐보아도 무방하다. 책에 나온 모든 곡을 찾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음반들이긴 하지만 현대적 버전의 음반을 대신 찾아 들으며 맘에 담아둘 곡들을 만나보는 것 또한 이 책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