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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도서] 폭력의 자유

김종철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조선일보에 대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기자회견이 있은 후 각계각층에서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있는 형세다. 언제 한번이라도 조선일보가 이름 그대로 언론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고 언제 한번이라도 검찰이 이름 그대로 사법기관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은데 너도나도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며 말이 많다. 입이 있고 손이 있는 것은 신체의 자유이고 하고 싶은 표현을 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이다. 하지만 조선일보와 채 전 총장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은 뻔한 연예인 스캔들 기사를 보는 것보다 더 노골적이고 저질적이다.

지난 이명박 정권 이후 지상파 뉴스와 종이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버젓이 한 나라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사는 이들인데 SNS상에서는 뜨거운 이슈가 9시 뉴스에서는 전혀 보도되지 않고 아침 신문들에서는 정권과 여당, 수구세력을 대변하는 기사만 쏟아낼 뿐이었다. 조폭처럼 국회를 점거해 통과시킨 종합편성 채널은 내년 재심사를 앞두고 또 말도 되지도 않는 편향적 기준을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다. 뭐, 그것도 자유다.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같은 신문과 인터넷 언론이 못마땅한 사람에게는 채널A와 TV조선이 좋을 수 있다. 반대로 조·중·동은 물론 지상파 TV뉴스도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종편 같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짝 취급을 받을 수 있다. 아무리 종편채널을 싫어한다 해도 하루 종일 종편을 틀어놓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굳이 식당 손님 모두가 보는 TV의 채널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럴 권리도 없고. 반대로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지하는 것이 가장 큰 사용 이유인 SNS의 어떤 의견과 발언 또한 제재할 필요도 권리도 없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한쪽의 권리는 무작정 보장해주는 반면 반대쪽 권리는 각종 규정과 법률, 댓글알바 따위로 제한하고 있다. 그것도 자유인가?

결코 자유일 수 없다. 애초에 공정한 룰과 공정한 경기장이 확보되지 않은 채 벌이는 싸움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다.

 

 

“종합편성채널은 상업 유료방송인데도 방송법에는 ‘의무전송 채널’로 규정되어 있다. 공영방송도 누리지 못하는 특혜를 받은 것이다. 편성과 광고에 대한 심의 규정도 느슨하다. 이명박 정권이 밀어붙인 ‘언론 시장주의’는 ‘미디어 악법’을 통한 종편 체제 구축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p.489)

 

지난 대선 이후 대선에 패배한 진영에서는 부랴부랴 언론 싸움에 뛰어들었다. ‘종편이 뭐 대선에 영향을 주겠어? 1% 시청률도 안 나오는데~’라고 쉽게 생각했다가 크게 당했다. 생각보다 기득권과 노년층, 보수 세력은 종편에서 방송해주는 뉴스와 프로그램을 기가 막히게 이용하고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매달 거의 강제적으로 시청료를 내고 있음에도 공영방송, 공적 언론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뉴스와 언론을 포기 했다. 여러 개의 협동조합 형태의 언론이 탄생했고 몇 만 명의 후원자를 모집해 그나마 언론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몇 개의 인터넷 뉴스를 만들었다. 뭐 그래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래와 피라미 정도의 싸움이랄까?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기존의 기득권은 원하는 것을 그대로 밀어 붙이고 있다. 각종 기관의 장에 수구세력을 심고 있고 대선 때 부르짖었던 공약은 이미 집어 치운 것 같다. 아무리 촛불을 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지난 이명박 정권이 후퇴시켰던 정치적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의 정도는 곱절로 후퇴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 「폭력의 자유」는 언론 자유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언론을 통제하려는 자들의 자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다. 이 책을 쓴 김종철씨는 동아투위 때부터 공정언론과 언론의 민주화를 위해 온몸으로 싸워 온 사람이다. 말 그대로 기자다.

 

 

“심지어 국내의 움직임을 외국의 출판물을 통해 알기가 일쑤다. 언론은 국민들로부터 불신당하고 언론인들은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 긍지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다. 우리는 오늘날 한국의 언론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통감” (p.182) -1971년5월 동아기자-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한 뉴스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언론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모두들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외국 언론에서 더 적극적으로 기사를 쓰고 칼럼을 썼다. 외국 언론을 통해 이 나라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까지 언론이 망가진 것일까?

저자는 언론 중 신문의 역사에 주목한다. 일제 강점기 언론의 상황에서부터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 이르기까지 언론이 어떻게 통제되어 왔고 또는 권력에 유착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세하게 기록했다. 차마 하나하나 소개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한국의 메이저 신문이라는 것들이 일제 강점기부터 미군정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을 거치며 어떻게 기생해 왔는지 또는 권력을 좌지우지했는지 적나라한 그들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언론이라 함은 권력의 4부가 되어야 하고 사회의 공기이며 비상식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데 한국의 신문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언론은 언제나 권력의 편이었고 사회를 더 어지럽히기 일쑤였으며 상식과 정의에는 눈감았다.

 

 

“5.16 군사혁명은 문자 그대로 혁명이기 때문에 ‘비민주적인 방법이긴 하나’ 장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이 이상 묵인하여준다고 함은 다시 걷잡을 수 없는 위험한 사태를 초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국민의 공통된 느낌이었으니 한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우해서는 다소간 ‘비민주적인 방법’이라 하더라도 이를 피할 도리는 없을 것이다.” (p.132)

<동아일보 1961.5.26 ‘혁명 완수로 총진군하자’>

 

독재 권력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애써 변명하고 싶겠지만 그렇다면 독재 권력에 그렇게 굴종했던 과거를 제대로 참회하고 사과해야 한다. 서슬 퍼런 독재시절 국민들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공포였는데 신문이라는 것들이 국민의 편이 되기보다는 정권의 나팔수가 되었으니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역할은커녕 존재 이유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박정희, 전두환 독재권력 내내 그들 편에 붙었다. 독재자들은 장군님으로 위대한 영도자로 찬양하고 그들을 뒷받침했다. 당연히 그에 따른 보상은 광고나 투자로 돌아갔다. 노태우, 김영삼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김영삼 정권 말기 나라 경제가 와르르 무너지는 와중에도 그들은 “경제위기감 과장 말자 (중앙일보 11월1일자)” “경제 비관할 것 없다(조선일보 11월 2일자)” “외신들의 한국 경제 흔들기 (동아일보 11월 10일자)” 라고 하며 무작정 권력의 편에 섰다. 그리고 진짜 나라 경제가 무너지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그들은 단 한 번도 잘못된 보도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이후 민주 정부 10년 동안은 줄곧 정권 트집 잡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저자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는데 한겨레, 경향과 같은 소위 개혁·진보 신문의 행태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반성과 자기비판은 두 신문의 제작책임자와 일선 기자들이 왜 검찰의 ‘기획·표적 사정’에 휘말려들었는지에 관한 원인과 과정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노무현 죽이기’가 대세를 이룬 상황에서 지나친 상업주의적 보도 경쟁에 뛰어들었는지, 노무현에 대한 적대적 감정에 편승했는지를 해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p.471)

 

고 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검찰과 조중동이 칼춤을 추고 있을 때 참여정부의 언론 자유 아래 마음껏 날개를 펼쳤던 소위 진보 매체들 또한 그 칼춤에 동조 했다. 무분별한 추측과 가정, 폭로와 음모가 활개를 치고 있을 때 어느 진보 매체 하나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그 사안을 다루지 않았다. 사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노무현을 욕하던 부류이든 암묵적으로 동의한 채 입 다물고 있던 부류이든 져야 할 책임의 무게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는 모두들 그 배를 타야만 했다. ‘모든 것이 노무현 때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후 그들의 태도는 조중동이든 진보 매체든 180도 달라졌다. 그들의 칼춤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조중동이야 원래 그런 존재들이니 말할 필요 없지만 진보매체들의 행태는 이해하기 어렵다.

 

 

“‘천안함 사건’ 명예훼손 재판이 열리던 시기에 한겨레와 경향신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을 비롯한 ‘진보적 매체들’은 ‘침묵의 카르텔’을 맺었던 것인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침몰 사고이래. 그렇게 끈질기게 기사와 논평으로 ‘북한 어뢰에 의한 폭침설’을 반박하던 자세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p.507)

 

천안함 사건과 같은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법이 없다. 모든 사안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권력과 언론은 한 몸이 된 지 오래다. 모든 것이 정치적 물타기 혹은 정치적 노림수를 위한 보도 내지는 폭로는 아니겠지만 그런 일이 많다. 그래서 한꺼번에 확 하고 타올랐다가 금세 후다닥 하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먹잇감을 찾아 하이에나 떼처럼 두리번거린다. 4대강도 그랬다. 쇠고기 파동도 그랬고 이명박 정권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비리와 의혹들에 대해서도 그랬다. 앞서도 말했지만 조중동이야 원래 그러니 애초에 기대같은 것도 없지만 진보 매체 또한 그들과 똑같으니 대중의 실망이야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언론이 4의 권력이 되어 실제 권력을 견제하고 면밀하게 지켜보고 비판하는 기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실제 권력과 한 몸이 된 언론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그런 폭력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유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대중에게는 폭력이다. 그들이 만들고 싶은 사회와 정치, 문화와 의식을 점유하고 있는 시장과 자본, 권력의 배후를 발판삼아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실제 몸으로 체감하는 현실과 다른 만들어 낸 현실에서 판단을 흐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옳고 그른 것, 상식과 몰상식, 정의와 불의의 구분은 모호해 진다.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개인의 자유는 통제의 대상에 들어가게 될 수도 있다.

 

 

오늘 오전 주요 포털의 메인과 검색어 상위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연예인의 열애 기사와 추신수, 류현진 뿐이다. 오늘 오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공약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기자회견을 했는데 그런 사안에 대해서 각종 논쟁이 쏟아지고 분석이 나와야 하는데 다들 침묵이다. 국민과 대중을 호구로 알아도 이렇게 호구로 취급할 수는 없다. 하지만 착한 것인지 정치의식이 없는 것인지 대중과 국민들은 별로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대통령이 선거 공약을 뒤집거나 폐기해도, 말도 안 되는 정책과 인사가 이루어져도 별 말 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공동 저항조차 하지 않는다. 너무도 조용한 국민들이다. 그러니 ‘이 정도쯤 해도 가만있을걸.’이라는 생각이 저들에게도 가득할 것이다. 어차피 언론은 자기들 편이니 언론에서 물타기로 며칠간 시끌벅적하게 만들어 관심을 돌려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폭력에 시달리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애당초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질질 끌려 다니는 사람들의 태도도 문제다.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 (p.86)

 

한국의 언론 역사는 질곡의 과정이었다. 민족지, 정론지 자청하는 자들은 있지만 정작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다. 언론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다면 그 자체로 역사는 잘못된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청산해낸 프랑스는 현재 언론 자유의 최상위에 위치해 있다. 드골의 나치 협력자 숙청이 없었다면 지금의 프랑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도덕적 차원의 해석보다는 ‘반역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후세에 중대한 교훈을 남겨준 사실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 민주주의가 급속하게 후퇴하고 잘못된 과거를 부활시키려는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다. 친일청산에서부터 독재부역에 이르기까지 잘못된 과거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까닭이다. 반민특위는 친일파 경찰에 의해 습격을 받았고 독재에 부역한 언론과 재벌은 이제껏 살아남아 떵떵거리며 기득권이 되었다. 그러니 역사의 시계를 수십 년 뒤로 돌리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기껏해야 SNS상에서나 뜨거운 감자일 뿐이고 TV에서나 신문에서는 이런 경향을 아예 다루지도 않는다.

드골의 말대로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 이 사회의 전반적인 면에서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청산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언론 분야는 더욱 심각하고 시급하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언젠가는 돌이키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을지도 모른다.

 

 

“권력이나 대자본과 하나가 되거나 스스로 권력이 되어 민중을 억압하는 언론은 그 자체가 반사회적이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언론이야말로 민중의 진정한 벗이다.” (p.7)

 

대중은 자신의 마음을 줄 곳을 찾는다. 표류하는 바다 위에서 등대 불빛 하나를 찾는 것이다.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진실을, 사실을 그대로 보도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분명히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 왜 9시 뉴스에서 다음날 아침 신문의 1면에서 찾아볼 수 없는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몇몇 대안 언론들이 탄생하여 활동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단지 선거를 앞두고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중동과 지상파 뉴스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공정한 룰과 경기장을 가질 수 있다.

 

대중과 국민도 그럴 자격을 미리 갖추어야 한다. ‘내 먹고 사는 일하고 관계 없는데 뭐~’,

‘정의, 진실 찾아봐야 뭐 도움이 돼~’, ‘어차피 똑같은 것들인데 뭐~’ 라는 수동적이고 패배

주의적인 자세는 버려야 한다.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행동해야 한다.

후원같은 것도 제대로 시작해 보고 찾아서 홍보도 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 이상 저들의 폭력이 자유롭게 우리를 유린하지 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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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과 언론, 기득권이 똘똘 뭉쳐 온갖 비리를 쳐대는 것이 슈작 님의 지적처럼 국민들이 너무 무관심하기 때문이죠. 도대체가 진정한 민주주의네 뭐네 이런 문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외국언론에 우리의 언론 자리를 내어준 그 심각한 사태가 뭘 의미하는지 인식할 여유조차 없다는 점. 참 답답합니다. 이게 국가적 존망이나 민족정체성의 붕괴까지도 초래할 수 있는 초극적 사안이거든요. 거시적 안목이 필요한 다급한 시점에 당장 눈앞에 벌어진 현상에 너무 소경과 시각장애를 자처하고 있단 말이거든요. 사실 이런 도서자체를 읽지도 않아요. 하긴 정치사회도서 리뷰도 안 읽고 피해 다니니... 에효ㅡㅡ 이 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돼가려고 그러는지... 또 흥분했네요.ㅎ

    2013.09.28 21:37 댓글쓰기
    • 슈퍼작살

      이 리뷰 쓰고 나서 고민을 좀 했어요. 퇴고라고는 전혀 하지도 않고 쓰는 내내 열이 받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거든요. 리뷰를 쓰면 쓸수록 화가 나서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제가 원래 역사, 사회 이쪽으로 관심이 많지만 언론사는 전문이거든요^^;; 대학 졸업논문 주제기도 했고요.^^bb 당분간 이런 책은 읽지 않으려고요.ㅎㅎ

      2013.10.04 12:01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