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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도서] 사건

아니 에르노 저/윤석헌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60년대 프랑스, 당시 23살 대학생이었던 작가 아니 에르노는 가벼운 데이트를 이어온 한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알게 된다. 중절수술을 집도할 경우 의사 산파전문의 약사 면허가 박탈되고 중절수술을 감행한 여성은 금고형 혹은 벌금형에 처해지며 범법을 저질렀다는 사회적 낙인을 찍어대던 시대다. 애초에 피임부터 불법이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아니 에르노는 중절수술을 했다는 지인의 소문을 물어물어 ‘천사를 만드는 여자’(임신 중절 시술을 해주는 여자를 가리키는 프랑스 은어)의 집을 찾는다. 천사의 도움으로 불법 중절수술을 하고 마침내 ‘태아’로부터 자유로워진 그. 아니 에르노는 본인의 중절 수술 경험을 30년이나 지난 90년대에 이르러서야 털어놓았다. “임신 중절이 이제는 금지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책 《사건》은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한 여성이 ‘임신 상태’에서 ‘임신을 하지 않은 상태’ 사이를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를 다룬 르포에 가깝다. 패혈증보다 두려운 임신을 막기 위해 본인의 다리 사이로 낯선 방의 커튼, 누군가의 흰머리를 보면서 속 깊이 탐침관을 넣어야 했던,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 결혼한 여자들의 사회가 아니 에르노가 기록한 이 단편적인 에피소드 안에 응축되어 있다.

아니 에르노가 대학교 강의실에서 본인과 다른 여학생들을 비교해 보며 실패했다는 기분을 느낄 때, 의사에게서 ‘사생아는 늘 예쁘더군요’ 따위의 모욕적 언사를 들을 때, 논문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 심경을 스스로 타락의 징표라고 여길 때, 탐침관을 질 안에 넣고 닷새 동안 고통을 견딜 때, 변기 물에 ‘물의 아이’를 흘러보내며 짐승같다고 자책할 때 아니 에르노를 임신시킨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법이 구속하지 않았으며 신체적 정신적 자유가 보장되었고, 아니 에르노를 집어삼킨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조차 싫어했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했다. 낙태 후 오텔디유 병원에 입원한 아니 에르노는 이 불공평함과 억울한 감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세대를 거듭하며 여성들이 거쳐 간 사슬에 엮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이 글을 쓴 90년대에 아니 에르노는 17구 파사주 카르디네에 위치한 천사의 집에 가기 전 그가 잠시 들렀던 카페를 오랜만에 방문한다. 차를 마시며 약속 시간을 기다렸던 그 카페, 지하 화장실. 화장실 내부를 묘사하며 책은 마무리된다. 그의 끔찍한 경험은 다행히도 과거에 머문다. “삶과 죽음, 시간, 도덕과 금기, 법을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경험, 육체를 통해 극과 극을 오간 경험으로 여겼던 사건을 단어들로 표현하는 일을 끝냈다.” 글쓰기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물질적인 증거, 일시의 죄책감과 서글픔까지 끌어안는 순간이다. 아니 에르노의 실존적인 글쓰기는 또 다른 세대의 여성들을 반강제적으로 엮어버리는 사슬에서 탈출구로 작용할 것이다.

[문학과 사회학 수업을 들었고, 학생 식당에 갔고, 점심과 저녁엔 학생들만 다니는 파뤼쉬 바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제 그들과 같은 세상에 있지 않았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여자애들, 그리고 내가 있었다.]

[따라가야 할 길도, 따라야 할 표지도 아무것도 없었다.
많은 소설들이 임신 중절을 언급하긴 했지만, 그 일이 정확하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방식에 대해서까지는 세부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스스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과 이제 더는 임신하지 않은 상태 사이는 생략되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 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 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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