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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도서] 시와 산책

한정원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시를 안 읽던 사람이 시집을 가지고 다닌다. 가장 갖고 다니기 쉬운 책인데도 두툼한 책들 사이에 끼워 넣지 못했던 책. 가끔 시를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면서도 마음을 담아 읽지 못했던 책. 나를 챙겨보는 시간이 부족해지자 손에 닿는 책을 지니고 다니게 됐다. 틈 날 때마다 시를 읽어내면서 조각조각 흩어지는 마음들을 다시 끌어 모은다. 늘 읽던 책들을 더 이상 집어 들 여유가 없을 때 시집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같기도 하다. 긴 문장들을 읽느라 에너지를 쏟기보다 짧고 임팩트가 강한 글에 더 집착하게 된다. 그게 더 힘이 될 때가 있다.

 

일상의 여유로움, 여백을 찾게 해주는 시가 좋다. 잠깐씩 마음 챙김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휴식이 필요할 때 읽으면 좋은 시들을 찾아 읽는다. 마음 챙김을 하지 않으면 습관이 된 생각, 말과 행동만 자연스럽게 반복하며 살게 된다. 이럴 때 잠시라도 딴 생각을 하면 자동화 시스템에 의지하던 나를 흔들어 깨운다. 짧게라도 나를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면 마음가짐부터 몸가짐까지 일순간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사색하는 시간을 꽉 차인 시간표 안에 넣어두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 그랬다 사색하지 않으면 진짜 얼굴이 사색이 될 거라고. 공감 가는 말이다.

 

<시와 산책>, 시에 마음이 사로 잡혀 있을 때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산책이란 말이 시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과제를 내게 얹어준다. 시를 읽고, 산책을 하자. 간단한 결심이지만 내게 꼭 필요한 과제다. 어쩌면 바쁜 현대인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일 수도. 이런 생각 덕분에 책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시를 읽듯 한 편 한 편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었다. 마침 빨리 읽을 수도 없는 글들이다. 일상을 세밀하게 더듬으며 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읽으면 좋은 글들이 이어진다. 시와 산책, 두 단어가 주는 느낌의 속도로 읽게 된다.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 (25쪽)

 

내가 보는 것, 읽는 것, 쓰는 것이 생각을 일순간에 바꿔놓는다. 독서가 그래서 좋다. 글을 읽는 동안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내가 읽고 있는 글에 집착한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다. 시를 읽고 있으면 시에 집착하고, 누군가의 글이 마음에 들면 그 사람의 다른 글을 찾아본다. 산책을 할 때도 다른 사람이 된다. 산책을 하는 동안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생각으로 이어지곤 했다. 평소와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산책하며 떠올린 생각을 글로 정리한 적이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나는 결국 읽고 생각하는 사람, 산책하며 생각하는 사람인 셈이다.

 

산책을 사랑했고 산책하던 중 숨을 거둔 로베르트 발저도 말한 바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다시 나 자신이 되었다.(26쪽)

 

내가 어떤 생각들을 떠올리며 사는지가 참 중요해진 지점을 지나고 있다. 책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어 마음 챙김, 생각 챙김이 절실할 때 이 책은 한 권의 시집처럼 가볍게 내게 날아 들어왔다. 작가의 글 모두를 시를 읽듯 음미하며 읽었다. 그리고 시집 한 권과 같이 가지고 다닌다. 시를 쓰듯 글을 쓴 작가의 글이 부러워진 마음 때문이고, 작가처럼 일상을 세밀하게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작가의 첫 책인 탓에 더 읽을 책이 없어 다 읽고도 가방에 여전히 넣어 다니고 있다. 다른 책이 나온다면 얼른 손에 넣을 것 같다.

 

세상과의 결속에서 틈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나의 내면이 나의 존재와 끊어지지 않으려 분투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영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계속 시도해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

저녁은 그렇게, 시를 읽는 나와 함께 늙어간다.(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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