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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 나는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생활을 자초했다. 달콤한 휴식? 직장인의 로망? 뭐든. 많이 생각하고,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다. 딸린 처자식 걱정도, 내 앞길에 대한 두려움도 나의 결단을 막지는 못했다. 두 달. 그냥 쉬었다. 책을 읽고, 돌이 지난 아이와 놀고, 틈틈이 입맛에 맞는 구인광고는 없는지 뒤적이면서. 그러다 문득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을 읽었다.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두 달 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내면의 복잡한 마음들이 바람 빠지듯 흘러 나왔다. 두 달이나 쉬었으니 이제 슬슬 빠지기도 했을 터이지만, 이렇게 일순간 다시 혼란에 빠져들 줄이야.
 
“우리들 그 누구도 우리 자신이 아니야. 우리들 그 누구도 우리 자신이 될 수 없어.” (2부 251면)
 
오르한 파묵은 <검은 책>을 통해 정체성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 내 말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을 하고 있는 나, 외부 문화의 영향으로 점점 민족성을 잃어 가고 있는 터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내 뤼야를 찾기 위해 주인공 갈립은 그녀의 과거를 추적하게 되고, 그 와중에 그녀의 이복 오빠인 제랄 역시 사라져버렸음을 발견한다. 갈립은 둘이 함께 있을 것이라 추측하여 제랄의 칼럼과 흔적들을 찾아 나서는데, 제랄의 글과 물건들을 통해 제랄의 생각과 행동들을 추측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자신이 직접 제랄의 칼럼을 써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제랄과 갈립은 모두 자신만의 언어와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가. 35년이라는 시간 동안 칼럼을 써온 제랄조차 온전히 그러지는 못했다. 작가인 갈립 역시 자신의 말이 아닌 책에 쓰여진 작가의 말들을 무의식중에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가공해 내뱉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제랄이 되고자 했을 때 과연 그는 어느 만큼 제랄이 될 수 있었는가?
 
“첫 번째 목소리는 당신이 ‘단순한 인격’이라고 했던 거였소. 누구에게나 쓰는 목소리 … 두 번째 목소리는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이자 당신이 가장 사모하는 사람들에게서 훔쳐 온 가면이지. … 세 번째 목소리는 이 둘이 다다를 수 없는 세계로 우리를 이끌었소. 검은 자아, 검은 문체!” (2부 173면)
 
오르한 파묵의 이러한 정체성 찾기는 잠자던 나의 생각들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꿈과는 달리 사회적 기준에 미달되지 않도록 학교에 다니고, 졸업하고, 직장을 다녔다. 일을 하면서도 나만의 생각과 행동으로 살기 보다는 회사의 환경에 입맛을 더 맞추었다. 친구들까지 만나지 못하면서 밤새 해온 작업들은 지금 나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가.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과연 나는 앞으로 어떠한 선택을 하고, 그 방향을 향해 매진할 수 있는 것인지. 적어도 앞으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꿈을 좇는 일은 없어야 하리라 생각해본다.
 
“손님들이 옷이 아니라 실은 환상을 사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진짜 사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옷을 입은 ‘다른 사람들’처럼 되고자 하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1부 95면)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두 달간의 휴식도 서서히 정리해야 할 때가 왔음을 느낀다. 비록 낯선 말들과 터키의 역사, 깊은 사고들로 인해 쉽게 읽히지는 않은 책이었지만, 1인칭과 3인칭의 독특한 서술 방식과 소설 중간 중간 들려오는 작가의 말들로 인해 그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by 꽃다지, 2007년 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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