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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6

[도서] 토지 6

박경리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서희 씨와 길상 씨에게

 

부러진 다리는 괜찮아요? 그만하길 정말 다행이에요.

길상 씨의 다른 여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나 마치 서희 씨 뒤에서 같이 걸어온 것 같았어요. 한겨울 바람 휘도는 길을 홀로 걷는 당신 등이 너무 얇고 투명해 불안했어요. 모포라도 한 장 둘러주고 싶었는데 어쩐지 걷던 걸음 그대로 날아가 버리길 원하는 것도 같아서 그러지 않았어요.

회령 여관방에서 술 취한 길상 씨에게 소리 지르며 주저앉아 울 때 나 그제야 마음이 놓였어요. 그렇게 해요 서희 씨. 당신 안에는 더 쌓아둘 자리도 없을 것 같아요. 밖으로 터뜨려요. 잘 한 거예요. 괜찮아요. 아마 길상 씨도 나처럼 안도했을 거예요.

더욱 더 고아 같아졌다는 그 마음으로 이제 어떤 길을 택해 걸음을 놓을지 걱정스러워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이미 알고 있을 테고 별 도움 되지 않을 말은 하지 않을게요. 그냥 밥을 좀 잘 챙겨먹어요. 꼭꼭 씹어서 맛있게. 너무 마르면 못써요. 방 안에서 도자기 인형처럼 꼿꼿하게 앉아 있지만 말고 햇볕도 쬐도록 해요. 어젯밤 『나니아 연대기』를 읽다가 서희 씨에게 꼭 해주고 싶은 문장을 발견했어요. ‘누구나 햇볕이 등을 비추고 있으면 모든 것이 더 좋게 보이는 법이다.’ 잘 먹고 잘 자고 해를 쬐면서 산책을 해요. 많은 게 더 좋아질 거예요. 다음 이야기에선 당신이 건강하게 아름답기를 기다릴게요. 창백하게 예쁜 건 떽, 못써요.

 

 

아직도 폭음 하나요 길상 씨? 이제 아니죠? 아니어야죠. 그러지 말아요. 거칠게 커가는 소용돌이를 짐작은 하지만 술은 아니에요. 회령 여관방에서 서희 씨한테 그렇게 막말 쏟아낸 것 좀 봐요. 술이 웬수라니까요. 하긴, 어떻게 배겨날 수 있겠어요. 그 세월이 얼만데. 그래요, 잘했어요. 그래야 살죠.

길상 씨, 당신은 개새끼가 아니에요.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아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고? 무슨 생각이건 좀 하면 어때요. 이런저런 생각을 해봐야 판단을 하죠. 무엇을 타협하려 했냐고? 되묻고 싶군요. 타협하지 않고 어떤 결정을 할 수 있죠? 제각각인 이들이 얽혀 굴려가는 게 세상이잖아요. 타협해야죠. 남하고도 하고 나하고도 하고. 못된 거 아니에요. 서희와 혼인할 생각을 했냐고? 좋아하는 여자를 거머채는 게 뭐가 나쁘냐고? 종신 종놈이 되어서라도 서희 곁에 있고 싶었던 게 아니냐고? 떠난다 하면서 왜 못 떠나느냐고? 길상 씨, 그 소용돌이요, 그냥 좀 놔두면 안 될까요? 잡아 세워서 뾰족한 곳 쳐내고 눈 가리고 입에 재갈 물려 땅에 묻는다한들 사라질 수 있을까요? 그냥 둬봐요. 억지로 잡아누르면요, 그거 병 돼요. 당신 다친다구요.

신분이 뭐가 중요하냐, 한 번 뿐인 삶 사랑을 택해라 같은 속 터지는 소리는 하지 않을게요. 인생사 그렇게 순수하고 간단하면 뭐가 문제겠어요. 다만, 당신의 오래고 큰마음이 술을 들이붓고 고함을 지르고 날을 세워 밖을 할퀴는 게 나만 속상한 건 아닐 거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서희 씨 우는 거 봤죠? 애기 때처럼 통곡하는 거 봤죠? 당신 앞이니까 그럴 수 있었다는 거, 당신이 제일 잘 알 테니까 괜한 훈수는 두지 않겠어요. 그냥 서희 씨 뭐라도 맛있게 먹게 분위기 좀 맞춰주고 햇볕으로 데리고 나와 그 창백한 등에 해 좀 쬐게 해줘요. 어쩌겠어요, 아직 아기씨인걸. 나중에, 서희 씨 잘 키워놓고 나서 길상 씨가 불어넣어준 사랑 그대로 듬뿍 받아요. 개새끼 운운하지 말고. 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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