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어디에나 있어.
(잰디 넬슨/이민희 옮김/밝은세상/2021)
소설 <폭풍의 언덕>을 좋아해서 23번이나 읽은 클라리넷 연주자 레니. 그녀에게는 할머니가 있고, 빅 삼촌이 있고, 언니 레이첼이 있었다. 언니는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리허설하다 치사성 부정맥으로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 엄마가 없었던 레니에게 언니는 엄마나 마찬가지였다. 언니의 애인 토비도 슬픔을 어쩌지 못했고, 레니 또한 그랬다. 둘은 슬픔을 달래려다 자꾸 키스를 하게 된다. 레니는 전학생 조를 좋아했다. 조도 마찬가지였다. 언니를 잃은 슬픔에 토비는 레니는 찾아왔고, 둘은 자꾸 키스 한다. 조는 그것을 보게 되고, 레니는 더 힘들어진다. 레니는 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할머니가 아끼는 장미를 꺾어간다. 화가났던 할머니의 마음을 본 레니는 할머니 역시 손녀를 잃은 끔찍한 슬픔을 겪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아끼던 <폭풍의 언덕>을 가위로 잘게 잘게 찢으며 아픔을 달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시간이 흐른 후 레니가 종이조각, 냅친, 테이크 아웃 컵 등에 썼다 버린 시를 나무 위나 할머니의 화원 바위 밑 등에서 발견하고 읽었던 조는 레니가 보낸 시를 읽고 마음이 풀어진다. "네가 뭘 겪었는지, 얼마나 끔찍했을지..."
<호밀밭의 파수꾼>에서도 홀든은 죽은 누이 동생을 그리워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가족이 죽는다는 것은 엄청난 슬픔이다. 그걸 제대로 애도하는 게 중요하다. 레니는 언니를 잃은 슬픔 때문에, 또 토비는 애인을 잃은 슬픔 때문에 잠깐의 선을 넘지만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사춘기 소녀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달콤 쌉사름한 초콜릿> <위대한 유산> <오만과편견><콜레라시대의 사랑><제인에어> 같은 고전과 함께 내용이 버무려져 좋다.
조가 속삭였다. 어떤 슬픔도 깃들지 않은 두 눈을 들여다보자 가슴 속 문이 활짝 열렸다. 이윽고 우리의 입술이 맞닿을 나는 그 문 반대편이 하늘이란 걸 깨달았다. P169
삼촌은 말했다. “그건 착각이야, 레니. 하늘은 어디에나 있어. 네 발치에서 시작하지.” 조와 키스하면서, 그 말이 처음으로 와 닿았다. P177
제32장
할머니에게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다는 것, 그 상대가 나라는 걸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 상대가 나라는 걸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p343
나는 책과 가위를 들어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그냥 해. 잘게 조각내 버려. 이렇게‘
나는 오늘 아침처럼 원예용 가위 손잡이에 엄지와 집게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그러나 이제 내 안을 휩쓰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그저 거센 분노였다. 그대로 가위질했다. 내가 밑줄치고 메모한 책, 수년간 강물과 여름 뙤약볕과 해변의 모래와 손바닥 땀으로 때 묻힌 책, 자나 깨나 끼고 다녀 이리저리 구겨진 책을, 또다시 썩둑 잘랐다. 그들의 굴곡진 인생, 불가능한 사랑, 그 모든 혼란과 비극을 파괴했다. 어느 새 나는 책을 공격하고 있었다. p347
내 남은 평생 언니는 죽고 또 죽을 것이다. 슬픔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 일부가 될 것이다. 걸음걸음마다 들숨 날숨마다. 그리고 나는언니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다. 슬픔과 사랑은 한 몸이라 어느 한쪽만 취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언니를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니를 본바아 배짱과 기개, 기쁨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다. p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