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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집

[도서] 단어의 집

안희연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날마다 좋은 날, 날마다 생일이라는 마음으로. / p. 131

 

가끔 단어를 몇 번 반복하면서 중얼거리다 보면 갑자기 그 단어가 낯설어지는 순간이 온다.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될까. 그냥 단어만 말할 뿐인데, 묘하게 그런 느낌을 받는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단어가 나와 손절을 치는 기분. 그럴 때마다 내가 뭔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

 

이 책은 안희연 시인님의 산문집이다. 요즈음 독서를 하면서 모르는 단어들을 검색할 기회가 많아졌다. 단어의 뜻을 검색해 머리에 채우는 나름의 쾌감도 있는데, 제목에서부터 큰 관심이 생겼다. 저자가 시인이기 때문에 소설에서 보지 못했던 또 다른 단어의 세계로 나를 이끌 것 같았다. 마치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는 느낌. 목차를 보니 아는 단어들도 있지만, 모르는 단어들도 많아서 냉큼 구매를 했으나,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저자는 스스로를 시인이 아닌 '단어생활자'라고 소개한다. 그 이유는 책의 주인이 말의 최소 단위인 단어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단어가 저자를 이루는 피와 살처럼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읽다 보니 맞는 말이었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생활속에서 나오는 단어를 생산적으로 소비하는 사람. 시인, 소설가 등 보편적으로 일컫는 직업과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그런 의미로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저자의 일 년간의 기록. 일상생활을 하는 중간에 툭 튀어나오는 단어로 추억에 빠지거나 상상력을 펼치거나, 또는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고자 하는 내용이었다. 모르는 단어는 내가 가지고 있는 단어의 이미지 자체가 없기 때문에 별 생각이 안 들었으나, 내가 알고 있는 단어들은 문학과 거리가 멀다고 느껴졌다. 플레뢰와 비저비터는 체육에, 네온과 규모는 과학에 가까운 단어일 텐데 이러한 단어들이 어떻게 문학적으로 재탄생이 될까.

 

개인적으로 유루, 탕종, 덖음이라는 세 개의 단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루는 눈물을 흘린다는 뜻인데, 책에서는 강아지의 유루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여기에서 유루증이 강아지의 눈물 자국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눈물은 공기와 결합하면 갈색으로 변한다고 하는데, 말티즈 견종에서 자주 발생하는 눈 아래 갈색 줄이 유루증으로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는 것도 좋았지만, 사과의 갈변은 사과가 운 흔적일까? 라는 저자의 표현이 이 단어를 문학적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머리에 각인이 되는 말이었다.

 

탕종이라는 단어는 효모의 힘을 빌리지 않고 반죽 단계에서 따뜻한 물을 넣어 빵을 만드는 방법이다. 책에서는 단호박크림치즈 탕종식빵을 구입하는데, 여기에서 탕종은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저자는 단어를 잘못 말하거나 적을 때에 아멘처럼 탕종이라고 외쳤다. 두렵거나 슬픈 일이 생길 때마다 탕종, 탕종,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고 하는데, 나는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탕종, 탕종,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나에게도 안전한 막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덖음이라는 단어는 찻잎의 공정 중 하나로 불에 볶는 과정을 말한다. 덖음과 유념이 사람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매일 들볶이는 과정을 덖음에, 매일 여기저기 치이는 과정을 유념에 비유해 이러한 과정이 향기롭고 귀한 찻잎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한다. 찻잎이 사람이고, 물이 세상이라면 그리고 어차피 담겨야 하는 과정이라면 그것을 믿고 안겨보자는 것. 이는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던 나에게 뜻하는 바가 큰 메시지였다.

 

읽으면서 많은 단어들과 저자의 다정한 이야기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처음에는 저자의 이야기에 울컥하는 부분도 있었으나, 대부분 많이 웃었다. 겨울왕국의 엘사와 가위손의 에드워드를 보면서 공감하거나, 예의를 갖춰야 하는 자리에서 베지밀 이야기를 꺼내는 과거를 반성하는 등 흔히 시인이라고 생각했을 때의 이미지와 다른 소탈한 모습에 웃게 되었다. 시인이라는 모습 자체가 내가 가진 또 하나의 편견이겠지만 말이다.

 

문학적인 표현과 삶의 의미로 재탄생된 단어의 변신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 역시도 단어생활자 선생님의 능력이지 않을까. 일상이나 생각들을 독자들에게 아낌없이 전달해 주셨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독서하면서 단어들을 정리해 그 중 하나를 골라 한 문장 짓기 라는 작은 퀘스트를 떠올렸다. 이렇게 하나씩 하다보면 나도 저자처럼 단어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단어생활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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