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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도서]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재영 책수선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재영 책수선은 세상의 모든 망가진 종이들을 환영합니다! / p.235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나는 지독한 책 한정 결벽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책에는 어떤 흔적이라도 남지 않도록 조심히 다루었다. 밑줄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으며, 그 흔한 인덱스 한 장도 붙이는 일이 없었다. 책도 무조건 빳빳한 새 책으로만 구매했었다. 표지도 구겨지지 않게 읽느라 목과 허리가 아픈 일은 다반사. 주변의 사람들은 뭘 그렇게 책을 불편하게 보냐고 웃었지만 내 몸 건강보다는 책의 안전이 중요하다면서 헛소리 대답을 했었다.

 

독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 풀어진 것 같다. 책에 인덱스를 붙이고 있으며, 그동안 하지 않던 책 중고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중고로 구매한 책이 절반이 넘을 정도로 비중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책에 밑줄을 긋거나 구김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하고, 배송 중 오는 상처에 마치 내 몸의 상처처럼 느껴기지도 하지만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책에 대한 스타일 때문인지 몰라도 중고서점에 파는 책들마다 전부 최상 도장이 찍힐 정도이기에 나름 의미가 없는 일 또한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재영책수선 님의 직업 에세이이다. 우연히 SNS와 즐겨 보는 유튜버 님의 영상을 통해 이 책의 발간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책과 관련된 직업이라고 하면 출판사 편집자, 도서관 사서 등 떠오르는 직업이 한정되어 있는데 책 수선가라는 직업 자체가 조금 생소했다. 책을 내 몸보다 더 소중하게 다루면서 책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관심이 생겼다. 서평 이벤트에 신청할 정도로 눈 여겨보던 책 중 하나였는데 좋은 기회가 생겨서 이렇게 읽게 되었다.

 

저자는 대학교에서 순수 미술을, 미국 대학원에서 제지와 북아트를, 이후 도서관의 서적을 수선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 들어와 재영책수선이라는 개인 작업실을 열게 되었다. 에세이에서는 책 수선가로서의 이야기뿐 아니라 수선을 의뢰하는 책들이 가진 다양한 사연들을 소개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 특별하지 않은 책들이지만 돈과 시간을 투여해 전문가에게 수선을 맡길 정도의 애정 어린 책에 대한 사연들을 읽으면서 눈으로 보는 라디오 사연을 보는 것 같았다.

 

사연이 깊은 책들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흥미로웠다. 할머니의 일기장과 자녀에게 성경을 대물림하고, 아끼는 만화책에 대한 이야기 등 사연이 깊은 책들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흥미로웠다. 그 중에서도 여행 일지에 대한 사연과 옥편 사연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여행 일지에 대한 사연은 친구와 전라도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들과 기록이 담긴 노트가 의뢰로 들어온 내용이다. 읽으면서 집에 있는 손바닥만한 여행 노트가 떠올랐는데, 대학교 졸업 이후 취업까지 미루고 대학교 친구 두 명과 함께 내일로 여행을 떠났다. 그때 나보다 더 계획적인 친구가 여행 일정과 체크 사항들을 링 제본을 해서 나눠주었는데 거기에 사진이나 관련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게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내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지나 내 머릿속에서도 희미해질 정도인데 기록이 있었다면 그러한 추억을 더 오래 친구들과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옥편 사연은 할아버지에서부터 삼촌과 아버지, 의뢰인에게로 내려온 한자 사전의 이야기이다. 사실 나에게 옥편이라는 것에 큰 기억이 없다. 단지 초등학교 졸업에서 선물로 받았다는 것 정도. 그것도 심지어 나에게는 존재 자체가 없어진 사전이어서 어떻게 보면 특별한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70~80년이 넘는 세월동안 3대에 걸쳐 한자 사전을 사용했다는 것이 나에게는 족보와 같은 가보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가끔 내가 아끼는 책을 조카와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한 맥락과 비슷한 생각이지 않았을까. 인터넷으로 한국어와 영어, 심지어 알지도 못하는 러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의 사전들을 볼 수 있는 시대에서 옥편이라는 게 신기했었다.

 

책의 사연뿐 아니라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알면 좋은 정보들도 많이 있었다. 수선과 복원의 차이부터 책 수선가가 사용하는 도구들, 책 수선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렇다. 책 수선이라고 해서 수선의 범위가 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책갈피나 굿즈 등 종이로 만들어진 물건들이라면 전부 수선이 가능하다는 게 새로웠다. 또한, 책 수선할 때 사용하는 도구들을 파트너라고 칭했다. 도구를 알 수 있는 것도 좋았지만 한낱 일할 때 사용하는 물건들을 파트너이자 동료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직업에 대한 저자의 애정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직장과 관련 시스템들을 동료로 여기지는 않았던 내 과거의 모습이 떠올라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책을 읽을 때 장갑을 끼지 말라는 내용을 보면서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도 있었다. 책을 유난스럽게 아끼는 입장에서 항상 책을 읽을 때 손을 씻고 책장을 넘기는 습관이 있다. 심지어 손에 유분이 남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손이 갈라져 피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 책을 읽을 때에는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덕분에 가뭄 때 땅이 쩍쩍 갈라지는 현상들이 내 손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이 책에서 그 부분이 나오는 것을 보고 손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면서도 조금 더 희생하라는 속마음이 나오기도 했다.

 

아무래도 생소한 직업에 대한 이야기여서 어렵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었는데 너무 쉽게 풀어진 내용들이어서 읽는 것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책 수선가라는 직업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미적 감각이 제로에 수렴하는 나로서는 꿈도 못 꿀 직업이라는 한계가 단박에 느껴졌다. 그래도 새로운 직업을 떠나 책의 이야기와 책을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재미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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