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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도서] 생년월일

이장욱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침묵하는 것들에 대한 반짝거림의 이야기들, 스쳐 지나가는 단어들이 있다.

소리 없이 자라나는 허공들과 구름들, 어느 순간 죽어가는 사람들이 들어 있다.

이 시집을 읽고 나서 공허함 속에 쓸쓸히 자라나는 많은 것들을 쓰러뜨리는 힘을 느꼈다.

옥상에서 까마득히 저 아래를 내려다보던 여자는뒤로 걸어 내려간 계단에서

환멸을 느끼기 전에 먼저 무심해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느 순간 사라져 있다.

 

시인은 사라지는 것과 스치는 것들, 마주하는 것과 마주칠 수 없는 것들 속에서

허공이 음악에게 하는 일을, 누군가 결정적으로 희박해지는 순간을 이야기한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때 우연한 목격자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동사무소에 가자

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

외로울 때는

동사무소에 가자

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

어제 죽은 사람들이 아직

떠나지 못한 곳

                      -<동사무소에 가자> 일부

 

사람의 경험은 신뢰할 수가 없었고, 우리는 모두 궁금한 표정이 되어 있다.

생년월일의 총 4부작 시들은 나라는 인간이 겪어 내지만 소리도 없이 진행되는

많은 사건들과 상황들, 죽음들, 시간에 대한 철학적인 통찰과 고뇌가 담겨 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과거가 빈방에서 깊어가고’ ‘밤은 그의 긴 골목이 되기도 한다.

 

근육질의 눈송이들

허공은 꿈틀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네

너는 너무 가까워서

너에 대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을 수는 없겠지만

 

드디어 최초의 눈송이가 된다는 것

점 점 점 떨어질수록

유일한 핵심에 가까워진다는 것

우리의 머리 위에 정교하게 도착한다는 것

                                                       -<겨울의 원근법> 일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이채롭다.

일제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우리가 지나치는 것들이 숨어 있다.

우리의 등뒤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들을 세심하게 발견하는 안목이 놀라웠다.

직설적으로 툭 던지는 시어들이 아니어서 더 오래 생각할 여지를 주는 시들이 많았다.

그것은 독자들이 시를 읽는 즐거움이자, 또 다른 세계를 통과할 수 있는 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살아가면서 죽음을 향해 가는 순간들을 현재진행형으로 살고 있다.

관절을 돌릴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 옛 친구들이 조금씩 마모되었다는 시 구절은 놀랍다.

이 시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시는 <>이라는 시인데 이 시가 나를 서평을 쓰게 했다.

일상적인 화법을 애써 전복시키려 하지 않으면서도 신선한 시어들로 채우는 힘이 있다.

 

이장욱 시인은 소설도 잘 쓰지만 시를 벼리는 힘도 대단한 작가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구름을 향해 떠오르는 애드벌룬을 바라보며’ ‘우리는 오후 다섯시처럼 가난해졌다

시 구절을 읽고 나면 맥주를 사 들고 오랜 친구와 골방에서 취해 있고 싶어진다.

혹은 잊고 지낸 내 혈액에 점점히 박힌 옛 조상들과 문우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시를 읽으면서 백석이 떠오르기도 했다. 왠지 그랬다. 시집을 읽으면 알게 된다.

영화와 음악, 소설과 시들, 머리카락처럼 달라붙은 기억들이 순식간에 호명된다.

딱딱한 치아가 조금씩 어긋나고 바지가 몸에 안 맞고그래도

누군가의 손을 잡고잠이 들어 목에서 피가 흘러도

이 모든 것을 동행이라고 부르고 싶었다는 시인의 사유가 마음을 정화시킨다.

 

우리는 삶의 무수한 소비자로 살아간다.

생년월일의 시집을 읽고 나면 마음이 허공에 퍼지는 음악소리처럼 나아간다.

마치 물로 만든 의자처럼 누군가 거기 앉으면 풍덩, 빠져버릴 것처럼그렇게...

좋은 시 구절과 시어들이 넘치는 시집이다.

많은 분들이 이 새로운 시집의 시들을 읽기를 희망한다.

여기엔 꼼꼼하고 세심하면서도 툭 던지듯 무심히 번지는 마음의 변주가 있으므로!

 


 


 

 

글과 책 사진: 아름다운 그녀

*서평 제목은 시집에 수록된 <평균치>P.28 구절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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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블로거 Scott

    세나님 덕분에 좋은 시집 알게 되네요.
    첫번째 시'동사무소에 가자'도 좋았지만 '겨울의 원근법'이라는 시가 세나님 프로필 사진속 '나무' 한그루, 최초의 눈송이가 되어 가지에 내려앉은 눈을 떠올려봅니다.^0^

    2021.01.27 21:04 댓글쓰기
    • 아름다운그녀

      시인이 시적거리를 유지하면서 시들을 정리한 게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프로필 사진은 집 근처를 걷다가 절 풍경을 찍었어요. 외진 곳에 살다 보니 절도 가까이 있네요.^^
      저도 앙ㅋ 님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되곤 해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오랜 친구가 있다는 건 마음이 뭉클한 일이지요.^^

      2021.01.28 13:41
  • 스타블로거 987

    좋은 시집 소개 감사합니다.
    겨울의 원근법은 요즘 계절이 계절이다보니 더욱 와닿네요.

    2021.01.29 18:46 댓글쓰기
    • 아름다운그녀

      집에 있는 책들을 요즘 천천히 다시 읽고 있는 중이랍니다.
      이 시집에 있는 시 한 편이 유독 제 마음을 움직여서 자발적으로 쓴 서평입니다. ^^

      2021.01.29 19:26
  • 책은YES24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좋은 시집을 알게 되었네요.~~

    2021.01.29 23:53 댓글쓰기
    • 아름다운그녀

      닉네임 자체가 예스를 상징하네요. ^^ 반갑습니다.
      좋은 시집을 알게 해 주셨다고 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

      2021.01.30 19:03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