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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박완서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이 책은 1970년부터 2010년까지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쓰신 660여편의 에세이 중에서 추린 글들을 엮은 것이다. 딸 호원숙님의 수고로움 덕분에 오랜 세월 흩뿌려진 박완서님의 흔적들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어서 더없이 감사하다.

그의 글은 쉽다. 마치 친구가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주듯 솔직하고 기교가 없으며 정감이 있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해주는 재미난 이야기와도 같다. 그렇지만 그냥 수다는 아니다. 생각할 거리가 있고 무엇인가 느끼게 해주는 교훈이 있다. 그래서 글에 깊이가 있다. 때로는 따끔하다. 작은 일상을 통해 세태를 비판하기도 하고, 찰라에 드는 생각만으로도 스스로를 반성하기도 한다. 그의 글은 따뜻하고 감성적이다. 나이들어서까지 소녀같은 감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상 만사가 모두 글의 주제였던 작가의 시선을 따라 그저 같이 보고 듣고 느낄 뿐, 속깊은 친구와의 대화 같은 그의 글로 인해 편안히 웃었고, 공감했고, 그것으로 즐거웠으니 되었다. 감상평도 부질없어 그저 좋았던 글귀들을 원문 그대로 발췌해서 기록해놓기로 한다. 주옥같은 표현들이 많아서 추리고 추리는 일이 힘듦을 충분히 이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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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꿈을 꾸고 싶다. 절박한 현실 감각에서 놓여나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만 한가해지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꿈을 단념할 만큼 뻣뻣하게 굳은 늙은이가 돼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녀 적에 살던 집 앞을 지나면서 울고 싶을 만큼 센티한 감정이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는 것만 봐도 나에겐 꿈을 꿀 희망이 있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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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도 말짱 헛것인 게, 있는 사람일수록 더 인색하다. 넉넉하다는 게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이라면, 요새 부자는 늘어나는지 몰라도 넉넉한 사람은 자꾸만 줄어드는 것 같다. p91

넉넉하다는 말의 소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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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소년의 뇌리에 생전 잊히지 않는 악의 화신으로 각인돼 있을 내 모습도 내 모습이려니와 구구절절 자신만만하고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나의 설교조 고음까지 귀에 쟁쟁하여 진저리가 쳐졌다. p97

나는 나쁜 사람일까? 좋은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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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에서 말벌을 발본색원했다고 생각했다. 조금도 개운하지 않은 기분 나쁜 승리감으로 나는 한동안 어깨로 숨을 쉬며 허덕댔다. 내 인간 승리는 이렇듯 비참하고 초라했다.

나는 그날 밤 악몽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 물공격을 피해 도망친 어미들은 어찌 되었을까. ...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크게 못할 짓을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랬을까, 그것도 의심스러웠다. 정말 그랬다고 해도 그건 타고난 소심증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한없이 작고 비루하게 느껴졌다. p104

다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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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보답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외손자 사랑이 좋다.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은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p148

민들레 꽃을 선물받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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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한테 어떤 정성을 들였다구. 아마 들인 돈만도 네 몸무게의 몇 배는 될 거다. 그런데 학교를 떨어져 엄마의 평생소원을 져버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장가들자마자 네 계집만 알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런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p151

사랑의 무게로 안 느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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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해 질 무렵까지 읍내에 가신 할아버지나 어머니가 안 돌아오시면 조금씩 조금씩 마중을 나간다는 게 동구 밖까지 이를 적이 있었다. 가장 행복한 건 동구 밖에 이르기 전 산모퉁이에서 고대하던 어른과 맞닥뜨리는 일이었지만 그런 일은 어쩌다가 있었다. 마치 우리의 인생행로에 요행보다는 불의의 재난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운 날보다는 쓸쓸한 날이 더 많듯이. p162

달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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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게 모든 잘잘못 이전의 더 큰 잘못이 된다는 걸 나는 이해할 수도 참을 수도 없었다. 저지른 잘못이 아닌 태어난 잘못에 나는 도저히 승복할 수가 없었다. p200

성차별을 주제로 한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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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p216

중년 여인의 허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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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1931~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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