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세 기리코의 범죄일기'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에 비해 표지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디자인이다. 도대체 기리코라는 노인은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범죄'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하게 되었을까 궁금해서 책을 열어봤다. 흉악한 할머니일지도 모른다는 예상과는 달리 기리코씨는 아주 평범하고 또 예의바르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오늘, 도모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첫부분은 마치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리게 한다. (이방인의 첫문장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Aujoud'hui, maman est morte.)'이다.) 함께 살던 도모의 죽음으로 인해 기리코의 신변과 사고 방식에 많은 변화가 생겼음을 알려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모와 함께 살던 집을 처분하고 작은 집으로 옮긴 기리코는 가족도 없이 언제까지 혼자서 지낼 수 있을지 걱정한다. 도모와 함께 지낸 것은 3년 뿐이었지만, 3년의 시간은 도모와 기리코에게 잊을 수 없을 만큼 반짝거리던 시간이었다. 도모를 떠나 보낸 슬픔과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녀에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그녀를 더욱 비관적 생각으로 몰아넣는다.
기리코는 빌딩 화장실을 닦으면서 이대로 고독하게 죽어가겠구나 체념한 채였다. 도모와 살기 전까지는.
"같이 살자"라는 말을 들은 그날부터 인생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 p.17
기리코는 그렇지 않았지만 도모가 달콤한 음식을 무척 좋아해 매달 도쿄 시내 호텔의 디저트 뷔페나 런치 뷔페에 가는 것이 취미였다.
기리코도 단 음식이 싫은 건 아니었고 요즘 디저트 뷔페에는 파스타나 피자도 있어서, 예쁘고 유행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일이 아주 즐거웠다. - p.14
마트에서 도모가 좋아하던 딸기 찹쌀떡을 보고 있던 기리코가 충동적으로 내린 생각은 바로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가는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딸기 찹쌀떡 절도 사건으로 76세 기리코씨의 첫번째 범죄 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기리코씨의 소원대로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가는 일은 쉽지 않다. 기리코씨는 점점 대담하게 다른 범죄를 노려보지만 번번이 미수로 그치고 만다. 각 장의 제목은 '절도-지폐 위조-불법 사채-사기-유괴-살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기리코씨가 감옥에 오래 있기 위해 선택한 범죄들이다. 절도로 시작한 것이 살인에서 끝난다면 결국 기리코씨는 감옥에 갔을까 궁금하겠지만, 이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적지 않겠다.
남에게 폐를 끼칠 순 없다. 진지하게 범죄를 생각하자. 확실히 교도소에 들어가고 거기서 생을 마감할 수 있을 만한 범죄를. 조카들에게 푸념만은 듣지 않도록. 다행히 그애들과는 성도 다르다. 계획대로 죄를 짓고 체포된다면 만에 하나 보도되더라도 그애들에게 폐를 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끝맺음 정도는 스스로 할 것이다. - p.82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기리코씨를 보며, 우리 주변에 있을것 같은 할머니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성실하게 자기의 일을 하고 사람을 좋아하며 다정한 사람. 가끔씩 기리코씨의 귀여운 모습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그런 기리코씨가 스스로 감옥에 갈 생각을 했다는 건, 혼자 사는 노인들이 얼마나 막막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 수 있다.
책을 읽으며 혼자 된다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았다. 인생의 모든 일들이 그렇지만, 대비를 해도 잘 안되는게 태반이다. 하물며 언제 생을 마감할지,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지를 어떻게 예상하고 대비해야 할까. 소설 마지막 부분의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인간의 죽음······ 특히 노인의 죽음이란 결국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 점수를 매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기리코도 어떤 죽음을 맞을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 p.340
이 책 한 권 만으로 작가의 팬이 되었다.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