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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다는 말처럼 새빨간 거짓말은 없다.   

 

초록바지와 나는 서로를 그리워던 차에 울산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같이 생활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좀체 가까워지지 못했다. 나는 나대로 바쁜 일상을 보냈고 초록바지 역시 나름대로의 자기 시간을 보내기에 바빴다.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서로 시간이 없다고들 둘러대면서 신경전을 벌였다. 시간은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시간은 많고 적음을 따지는 그런 개념이 아니었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만 있다면 얼마든지 만들고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 시간이었다. 차라리 관심이 없다거나 심사가 뒤틀려 만날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았다. 초록바지는 같은 울산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둘러대면서 요리조리 빠져 나가는 나를 지켜 보면서 뭔가 수상하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상황이 계속 이런 식으로 흐르자 초록바지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식으로 자기 생활에만 열중했고 나와의 만남을 등한시했다.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자존심이 상해 차마 전화를 하지는 못하고 밤 10시가 넘은 시각 초록바지가 자취를 하고 있는 아파트로 찾아갔다. 나를 반긴 것은 초록바지의 불 꺼진 창문이었다. 밤 10시가 넘은 야심한 시간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몰라도 초록바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초록바지의 불꺼진 창을 보는 순간 나는 내 대갈통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 창은 소통할 수 없는 우리들의 현주소였고 시들어 죽어가는 우리들의 무덤처럼 기분나빴다. 초록바지는 쉽사리 내 손아귀에 움켜 쥘 수가 없었다.

 

 

초록바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틈을 타서 내주변에는 여자들이 자꾸만 꼬여들었다. 초등학교 여선생과 미스 고가 그랬고 지금은 내 수업을 듣는 대기업 임원 부인이라는 여자가 내 곁을 맴돌고 있었다. 초록바지는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는 다른 것은 맹탕이어도 자기 남자의 수상한 거동에 대해서는 귀신처럼 알아차렸다. 그녀가 써 보낸 편지에서는 내가 매사에 솔직하지 못하고 자기에 대해 무언가를 계속 속이고 있다고 했다. 최대한 판을 깨지 않으려 우호적인 멘트로 일관했지만 경어체를 쓰지 않은 그녀의 문장에서는 나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묻어났다.  

 

 

- 요즘 내 머리가 복잡하다. 사람이 산다는 것 참으로 묘하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고뇌가 있어야만 하는가. 상대에 따라서는 좀 덜하기도 하겠지만 나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당신은 나에게 언제나 솔직성이 없고 숨기는 것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찌 사랑하지 않고 살 수 있으랴. 어찌 당신 없는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으랴. 사랑 없는 평온은 파도 없는 바다와 같다. 생동하는 환희를 맛보기 위해서는 언제까지나 당신과 뜻을 같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은 늘 나에게 말한다. "너는 너의 일 잘하고, 나는 나대로 열심히 살고 있으면 됐지" 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보다도 우리라는 강한 일체감이 목마르다. 청산, 올 가을에는 우리들을 위해 좀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 당신의 숙 으로 부터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초록바지가 솔직하지 못하고 뭔가 숨기는 꿍꿍이 속이 있다고 의심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양심이 찔렸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이상하게도 뜻하지 않게 내 주변에는 여자들이 꼬여들었다. 그렇다고 초록바지를 향한 나의 일심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이 여자 저 여자를 거치면서 더욱 또렸해 지는 것은 초록바지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내 수업에 유독 열심을 보이는 두 명의 미씨 아줌마들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지내는 친구 사이였다. 둘 다 삼십대 말에서 사십대 초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는데 민법이 어려웠는지 수업시간만 끝나면 나에게 달려와 이것저것 물었다. 한 여자는 모르는 것을 물어서 이해를 해 나갔으나 나머지 한 여자는 내 설명을 들어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하소연이었다. 처음 법을 대하는 여자가 겪기 쉬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다른 방법이 없겠느냐 하자 옆에 있던 친구가 선생님한테서 특수과외를 좀 받으라고 거들었다. 그래서 민법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던 그녀는 나에게 과외를 받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대기업 임원의 부인으로 명문대학교 영문과를 나온 재원이었다. 키도 훤칠하고 생긴 것도 세련되었으며 남편이 돈이 많아서 그런지 딱정벌레처럼 앙증맞게 생긴 빨간 외제차를 몰고 다녔다. 그녀는 당시 학원 수강료의 세배를 주고 일주일에 한번 씩 세 시간 정도 과외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과외 수업을 할 장소가 마땅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과외 수업을 할 것인가를 고민을 했는데 묘책이 서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내 하숙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내심 바랬다는 듯이 내 하숙에서 과외를 받게 된 일을 좋아하는 눈치였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부터 그 여자는 차를 대문 앞에 대고 내린 후 이것저것 먹을 것을 준비한 가방을 들고 하숙집으로 들어왔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하숙집 아주머니가 이 광경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은 당연했다. 내 하숙은 이층이라 문을 닫고 들어가 방안에 들어앉아 서 너 시간 정도 공부를 했는데 아마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리쑹했을 것이다.

 

첫날에는 한 시간 정도 수업을 하고 그녀가 준비해 온 커피를 마시며 수업을 끝냈다. 두 번째 날부터는 그녀는 잔뜩 음식거리를 챙겨서 싸들고 왔다. 그녀는 내 방에 와서 고기도 굽고 포도주도 한 잔 따라주며 요기를 하고 나서 공부를 하자며 후라이판을 펼쳐 놓는데 별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고기를 구워 내 입에 가까이 들이대며 '아' 하고 입을 벌리라고 하였다. 나는 내가 먹겠다고 했으나 한사코 내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어 그라스에 든 포도주가 들어가자 속이 쓰리면서 머리가 휑하니 어지러워졌다. 긴장한 탓에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르쳐야 할 진도를 맞추려고 애를 썼으나 그녀는 그런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는 대학시절에 현재의 남편을 만나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한 결과 남편이 대기업 임원까지 올라갔으나 허구한 날 잦은 해외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돈과 시간이 많았지만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무척 허전했을 것이다. 새로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 무언가 의미를 찾아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주변의 부추김에 떠밀려 부동산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는데 그곳에서 때마침 나를 만난 것이다.

 

공부를 마치고 나서 차를 마시면서 나는 주로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나이로 치자면 나 보다 열 댓 살은 더 먹은 누님뻘이었다. 그녀가 원한 것은 공부가 아니었을 것이다. 무덤같이 변해가는 결혼생활의 허전함을 위로 받고 싶었고 시들고 위축되어 가는 가슴에 뜨거운 불을 한 번 지펴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잘 알지는 못했지만 각자의 가정은 그들의 성(城)처럼 보호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이었다. 가정을 가진 유부녀는 특별히 취급해야 할 품목이었다. 레인코트와 미스 고와는 상관이 없었지만 그녀와 관계를 하면 불륜이며 가정을 깨는 일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 선생님, 다음 주 수업은 크리스마스 이브날 인데 다른 약속 있으세요?

 

지난번 생일날 때도 그랬지만 이브 날은 초록바지를 당연히 만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서로 신경전을 벌리는 중이어서 딱히 정한 약속이 없었고 초록바지를 만날지도 안 만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쪽에서 연락이 오면 만나는 것이고 안 오면 못 만나는 것이었다.  

 

 

- 아직 특별한 약속은 없어요. 왜요?

 

- 과외공부 마치고 가까운 경주 라도 한 번 다녀오는게 어때요?

 

- 경주라... 그렇게나 멀리나요? 집에 아저씨는 어쩌구요?

 

- 신랑은 지금 미국 출장 중이어서 한 달 있어야 와요.

 

- 글쎄요, 한 번 생각해 보죠, 혹시 일이 생길 수도 있어 확답은 못드리겠네요. 

 

- 선생님, 그런 날 맹숭맹숭 보내기는 그렇잖아요? 앞으로 계속 날씨도 좋다는데... 그럼 특별한 일 없으면 약속이 된 걸로 알고 있을께요!

 

-(.......)

 

 

이 대목에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결정도 일방적이었다.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초록바지가 보고 싶어졌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경주로 가자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는 초록바지와 함께 보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초록바지에게 전화를 걸어 크리스마스 이브 날 촛불과 케이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퇴근해서 내가 있는 하숙으로 오라고 했다. 전화를 받은 초록바지는 알았다고 대답은 했으나 뭔가 시원스럽게 들리지는 않았고 꼬랑지를 늘어뜨리고 미적거렸다. 아무튼 그 미씨 아줌마가 경주를 가자는 날 나는 초록바지와 만나자는 다른 약속을 잡은 것이다.   

 

 

지난 번 초록바지와 헤어지던 날이 생각났다. 만나서 놀다가 밤늦게 헤어지기가 아쉬워 집에 들어가지 말고 모텔로 가서 사랑을 한 번 나누자고 했다. 내 말에 초록바지는 질겁하면서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쳤다. 사슴이 사자의 추격을 따돌릴 때의 순발력처럼 엄청 납렵했다. 그녀는 결혼하면 준다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밉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지혜로운 처사였다. 미련한 내가 다시 붙잡아 통사정을 하고 애원을 하며 모텔 주변까지 다시 왔으나 초록바지는 끝내 도망을 쳤다. 그 일이 있어서 그런지 초록바지는 내가 있는 하숙으로 오고 싶기는 한데 하숙으로 왔을 경우 내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내 가슴에 못이라도 박지 않나 염려해서 그런지 엉거주춤이었다. 초록바지는 안테나를 길게 쭉 뽑아 내 쪽으로 늘어 뜨리고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이었다. 

수업을 받을 미씨아줌마가 오기 전에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 두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과외수업은 이제 그만두어야만 한다고.  그녀는 내가 달라고 하면 반기는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허락할 것이다. 계란형 얼굴에 윤기있는 머리결이 세련되게 보였다. 바바리 차림에 힐을 신고 다녔는데 몸매가 좋은 미씨였다. 모든 것이 살아 있었고 쓸만했다. 이 정도면 침 흘리며 환장할 남자들이 줄을 설 것이다. 깡마르고 훤칠한 그녀는 이미 깊게 패어지고 두드려져 불이 붙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장작이었다. 그녀의 남편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같은 남자로써 남의 여자를 데리고 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수업을 마친 뒤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 수업도 마쳤고 내 차로 경주로 가시자구요. 바람이나 좀 쏘이고 오죠!

 

- 사모님, 바람은 경주에만 부나요. 이곳도 바람이 부는데 경주까지...

 

- 아-휴, 선생님은 아무 것도 모르시면서... 이곳 바람하고 경주 바람하고 같은 줄 아세요? 거긴 공기 부터가 훨 틀려요, 어서 나가요, 네에?

 

 

-(.......)

 

 

나는 용기를 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해야만 한다. 바보처럼 미적이지 말고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라고 말하라고 내면에서는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입이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연상의 여자가 내말에 실망하게 될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에 썩 내키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계속 말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일순간 침묵이 흐르자 나는 입을 열었다.  

 

 

- 저...사모님 긴히 드릴말씀이 있어요

 

- 무슨 말씀요?

 

- ... 벌써 우리가 공부한지 한 달이 되었네요

 

-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그런데요?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오로지 그녀는 나와 함께 경주를 간다는 기대에 차 있어 기분이 다소 업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 예,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가르쳐 드릴 것이 없어요. 중요한 개념은 다 설명을 드렸어요. 이제 사모님 혼자 힘으로 공부를 하셔야만 돼요!

 

- 어머?, 그 어려운 걸 어떻게 혼자서 해~요?, 말도 안돼

 

- 사모님, 죄송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예요. 더 가르쳐 드릴 것이 없어요.

 

- 아이, 그런 말이 어딨어요! 나는 아직 더 배워야 하는데.... 진도만 나갔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에요. 선생님, 일방적으로 그러는게 어딨어요? 저도 계획이 있는데, 아이 참...

 

- 죄송해요. 그동안 수업 때마다 맛있는 음식 해 주시고 잘 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아이, 선생님 이건 말도 안돼요, 이건 아니죠!

 

계속 말싸움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순간 나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조금도 주저함이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갑자기 당한 일에 어이가 없다는 듯 한참이나 그 자리에 말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마음 아픈 순간이었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는지는 한 참을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서둘러 대문을 향해 급히 나갔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하고 나가는 품새가 잔뜩 뿔이 나 있었다.

  

- 쾅!

 

그녀는 대문을 세게 닫고 나가버렸다. 작별인사라도 하려고 내가 대문을 열고 나갔을 때는 그녀는 이미 차를 몰고 골목을 나서고 있었다. 남녀의 만남이란 좋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서로의 간도 내어줄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오해가 있든지 이런 저런 이유로 헤어질 때는 살얼음판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문제는 두 사람의 사이가 안 좋을 때였다. 남녀가 만나 사귈 때는 두 사람 사이가 안좋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한 번 쯤 생각해 둘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미씨 아줌마를 계속 만날 것도 아니어서 큰 걱정거리는 아니었다. 그 미씨 아줌마와 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금이 그어져 있었다. 여러가지 여건으로 보아 내가 그녀와 섹스파트너가 되는 이외에는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기는 어려웠다. 그녀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기에 그녀가 떠난 뒤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했다. 나는 다시 대문안으로 들어서면서 속으로 혼자 독백을 하고 있었다.

 

- (청산아, 야!, 이 자식아, 너 정말 잘 처리했어!. 잘했다, 초록바지를 두 번 배신할 수는 없어... 정말 잘.했.어!)

 

수업을 하러 오기 전에 그녀는 오늘 나와 경주로 데이트를 갈 생각을 하며 마음이 분준했을 것이다. 지겨운 겨울이 지나고 인생의 봄이 오려나 하는 기대를 가졌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와 불륜의 늪에 빠져 초록바지의 눈에서 눈물을 쏙 뺄 또 한 번의 배신을 해서는 안된다고 거듭 맹세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하숙집 아주머니와 딱하니 눈이 마주쳤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경주를 가자던 미씨녀가 이 집에 들어오는 시각부터 떠나간 이 순간까지 우리가 무엇을 하나 귀를 쫑긋 세우고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 틀림없다.  

 

- 아주머니 방금 그 여자와는 이제 과외가 끝나서 앞으로는 다시 오지는 않을 거예요!

 

- 총각, 참 잘했데이, 참 잘했어

 

-  네~에?

 

- (........)

 

 

무엇을 잘했다는 말일까. 그동안 미씨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일까? 하숙집 아주머니는 집에 들어 앉아서도 모든 일을 훤하게 내다보는 사람같았다.  

 

 그날 저녁 나는 초록바지가 퇴근해서 하숙으로 올 것으로 생각하고 케잌과 과일 그리고 백포도주를 사서 초록바지가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시간은 쉴 새 없이 달려가는 동안 내 속은 점차 검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대낯 부터 경주를 가자던 그 미씨를 뿌리친 자부심으로 초록바지가 오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을 확증해 주리라는 기대로 허둥댔다. 밤 7시가 되고 10시가 되었으며 이윽고 자정이 지나도 초록바지는 오지 않았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연인들이 어딘가 숨어 들어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다. 첫 눈이라도 쏟아져 내렸으면 나는 내 처지가 가련해 펑펑 소리내어 울고 말았을 것이다. 여태까지 초록바지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초록바지는 이 시각 울산에는 없는 것이 분명했다. 울산에 남아 있다면 내가 보고 싶어서라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고는 못 베겼을 것이다. 그녀 역시 잔뜩 고민을 했을 것이다. 울산에 남아 나를 만나서 외박하는 일을 뿌리치지 못한다면 차라리 부산으로 내빼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울산에 있으면서 이 시각까지 나타나지 않을리가 만무했다. 

 

 

그 날 밤 초록바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 오지 않는 초록바지를 원망하며 나는 혼잣말로 미친년 더러운 년 이라는 말을 수없이 내 뱉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며 초록바지를 원망했다. 방에 드러누운 다음에는 몸을 뒤척이며 분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넘기자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오지 않는 사람을 무작정 기다리는 내가 바보 같았서 였다. 나는 태연하게 촛불을 밝힌 다음 백포도주를 따라서 술잔을 기울였다. 나 같이 머리나쁜 놈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촛불을 응시할 때 닭똥같은 눈물이 흘러 밥상에 떨어져 내렸다. 

 

 

 

 

 

 

 

 

 

역시 초록바지였다. 어쩌면 그녀는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발겨 놓으며 애를 태울만한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나같은 것을 외면할 충분한 명분도 있었다. 사랑을 거래로 본다면 나는 형편없는 파트너였다. 믿음을 주지 못했고 한동안 딴 여자를 만나느라 오랜 세월 그녀의 가슴에다가 대고 총을 쏘아댄 남자였다. 그런데도 반성을 하기는 커녕 외지에 까지 와서 바람을 일으키고 다니며 오로지 상대의 몸만 탐했다. 초록바지 입장에서 보면 나라는 남자가 한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 나라는 남자를 생각할 때면 나는 초록바지를 사랑하기 보다는 초록바지의 구멍을 좋아하는 남자로 비쳤을 것이다. 만일 어디서 구멍을 하나 구해 수중에 들고 다닐 수 있다면 자기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을 남자라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고 내가 그녀에게 한 일이란 고작 그런 것이 다였다. 이런 사람을 남자 친구라고 초록바지가 쉽게 몸을 내어 준다면 오히려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초록바지는 결단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일이 꼬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녀를 믿게 만들 한방이 필요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는 없었으나 나는 그녀에게 신뢰를 보여 주어야만 할 것이다. 속이 쓰렸다. 과도한 신경을 쓴 탓인지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가물거려 볼 수가 없었다. 눈물이 말라 얼굴이 버석거렸다. 죽지 않으려면 잠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술병을 다 비운채 쓰러져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점심 먹으라며 아래층에서

하숙집 아주머니가 고함을 치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새날이 밝았다. 힘들고 얼룩진 어제는 지나갔다. 오늘은 새날이다. 나는 어제를 묻어 버리고 싶었다. 저녁이 지고 새벽이 와서 새 날이 열리는 것은 어제가 청산되고 새날을 허락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일로 새날까지 지운다면 사람은 도저히 살아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이 괴로우면 오늘만 지울 일이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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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아자아자

    초록바지가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죠.
    그녀가 의외로 섬세한 사람 같아요.
    회사로라도 찾아가 남친이라는 확신을 주던지...박력있는 모습이 필요해요. 그럼으로써 청산 자신에게도 확신을 주는거고요.

    2014.03.24 11:48 댓글쓰기
  • 열정

    맞고요, 맞습니다. 청산이 나쁜 남자지요. 그런대 초록바지는 이런 남자를 잊지 못하죠. 아이러니 입니다.

    2014.03.24 15:33 댓글쓰기
  • 별따라

    초록바지와의 관계는~~숨바꼭질하나요?여전하네요 잘 읽고갑니다^&^

    2014.03.25 12:22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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