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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홀라당 뒤집어엎을 때가 되었다.

 

 메마른 공업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며 나는 너무나 오래 나의 본업을 잊고 있었다. 학원 강의를 해서 번 돈을 술과 여자에게 다 허비해 버렸다. 내가 수험생이라는 사실을 잊어가고 있었다. 나의 토양은 양분이 없어져 흙이 푸석거렸고 윤기가 없어 씨앗을 뿌려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토양으로 변해갔다. 도저히 이대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사람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없으면 사람이라 부를 수가 없었다. 울산으로 내려와서 초록바지와 오붓한 관계를 이어갈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술에 쩔어 몸이 상했고, 학교나 직장과는 달리 학원 강사라는 것이 이름만 그럴싸한 허울일 뿐이지 나를 존경하거나 가르쳐서 보람을 거둘 학생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돈을 지불하고 강의를 들으며 서로 아끼고 존중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계약관계일 뿐이었다.

 

 

어영부영 시간만 보낼 일이 아니었다. 몇 달 강사료를 착실히 모아 이곳을 떠나서 내년 시험에 매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지난번에 내가 있던 울산으로 놀러왔던 진철이 형의 5촌 아저씨뻘 되는 친척이 김해에 있는 요양원에서 직원으로 일을 하고 있어서 그곳에 방을 얻어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나더러 술만 마시며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시험공부에 전념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 진철이 형이 아는 친구도 그곳으로 옮겨와 공부하기로 되어 있어 나도 합류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진철이 5촌 아저씨의 중학교 1학년과 3학년짜리 사내아이들의 공부를 가르치는 과외선생 자격으로 그곳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할 수 있는 방을 하나 얻었다. 내외간에 몸둥아리 하나로 요양원에 잡일을 도맡아 보면서 갖은 허드렛일을 다 하고 있지만 자식들에게만은 공부를 시켜 남부럽잖게 살기를 바랬다. 아이들의 공부는 반에서 중간 정도였다. 오로지 미래의 희망을 아이들에게 걸었던 그 부모들은 내가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도록 융숭하게 대접을 해 주었다. 비록 요양원이라고 하지만 이곳도 세상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는 곳이라 미사일 빼고는 없는 것이 없고 못 만드는 것이 없었다. 내 한 몸 살아 가는데는 큰 불편함이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내가 거주하는 곳은 요양시설 담장 울타리 안에 있는 민가의 작은방 한 칸 이었다. 정신병이 든 환자들은 요양원의 쇠창살을 통해 우리 쪽 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정신이상을 이유로 수많은 남녀 수용생들이 이곳을 들락거렸으며 그들은 종종 쇠창살을 잡고 우리 쪽을 향해 고함을 질러 대고는 했다. 요양원내에는 마당이 넓어 무밭과 배추밭도 있었고, 젖소 열 댓 마리 키울 만큼 넉넉한 마당과 축사도 있었다. 축사 안에는 말린 건초가 가득차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곳과 바로 붙어 있는 담장밖 나즈막한 언덕은 가야시대의 유적지로 많은 유물이 발굴되기도 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장소는 천 오륙 백 년전 움막을 치고 화덕을 파고 살았던 바로 그 집터였다. 요양원 안에는 매일 소문이 돌았다. 환자 아무 아무개가 어제밤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 와서 독방에 감금되었다거나 정신병이 있는 어떤 노인네가 목을 매어 죽어 나갔다는 소식, 어떤 여자 환자가 다른 남자 환자와 눈이 맞아 붙어먹다가 임신해서 아기까지 낳았다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들이 항상 넘쳐났다. 어떤 때는 요양원 과장이 쌀과 부식을 떼어 먹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요양원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집사격인 진철이 형의 5촌 아저씨가 집안 조카들이라며 데리고 온 나를 포함한 고시생 3명이 원장의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 아저씨가 원장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어 우리는 도리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원장의 격려를 받으며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었다. 수용자들은 창살의 문을 통해 우리들이 있는 곳을 향해 손짓을 하며 할 말이 있으니 자기들한테 오라고 사정을 했다. 그들의 하소연이라는 것은 기껐해야 자기들이 쓴 편지를 바깥 우체통에 좀 넣어 달라는 것과 같은 소소한 것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절박한 사연들이었겠지만 우리는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그럴 때마다 그냥 웃으면서 지나치는 식으로 대응했다.

 

 

이곳 요양원은 공업도시와는 너무나 다른 전원이었다. 아저씨는 정신요양원내의 잡일과 농사일 그리고 소를 키우는 일을 도 맞아 하였다. 그나마 일이 끊어지면 아이들 교육을 시킬 수 없다며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을 하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아주머니는 아저씨의 일을 돕기도 하고 때때로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인근 비닐하우스 꽃밭에 가서 날품을 팔기도 했다. 그래서 내 책상에는 늘 풍성한 꽃들이 끊이지 않고 공급이 되었다. 조금씩 흠이 나서 상품으로 팔기는 뭐한 모란, 카네이션, 장미, 소국, 대국, 안개꽃을 비롯해서 하우스 안에서 사시사철 재배되는 각양각색의 이름 모를 꽃들이 내 책상위에 올라 방안을 환화게 만들었다.

 

메마른 공업도시에서 술과 매연과 타락에 찌들은 나의 영혼은 이곳에 와서 다시 풍성하게 살찌기 시작했다. 나는 점차 술을 거의 마시지 않게 되었고 공부에 상당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공부하다가 답답하면 이웃해 있는 수로왕릉으로 산보를 나가거나 저수지 둘레 길을 걸으면서 비목과 같은 노래를 부르며 정서적인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아침에는 요양원 바로 건너 산으로 올라가 향이 짙은 들국화와 같은 야생화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다. 차츰 아이들의 성적도 오르자 아저씨 내외는 기뻐하며 나를 무슨 칙사 대접 하듯이 깍듯하게 대해주었다. 늘 부족하고 마이너스였던 일상이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차고 넘치는 분에 넘치는 삶이 이어졌다. 

 

 

울산을 멀리 떠나 김해에 와서 전원생활을 하다 보니 다시 새록새록 피어나는 것은 초록바지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나는 초록바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울산으로 편지를 띄웠고 초록바지는 답장을 하거나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내가 있는 김해로 와서 구지봉이나 수로왕릉 그리고 숯막이 있던 쪽의 저수지 둘레 길을 종종 함께 걸었다. 초록바지는 일전에 사면바리를 옮긴 일을 괘씸하게 생각하기도 했으나 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 노여움이 많이 거두어 들인 것 같았다. 자기가 의사한테서 들은 말로는 사면바리를 가지고 있는 환자가 앉았던 의자나 사용했던 수건, 그 사람이 들어간 목욕탕의 탕에 아무 생각없이 들어갔다가 재수가 없으면 옮을 수도 있으므로 사면바리는 반드시 바람을 피워서 얻게 되는 성병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더군다나 내가 한사코 그런 부정한 일이 없다고 강하게 부인을 하자 초록바지도 나의 말을 믿고 마음을 돌린 것 같았다.

 

 

 그 이후 우리는 울산과 김해의 먼 거리에 있으면서 서로를 많이 그리워했던 것 같다. 쉬는 날 울산에서 올라온 초록바지가 김해에 와서 시간을 보내다가 날이 어둑해서 그녀를 떠나보낼 때에는 서로 헤어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김해로 온 이후 초록바지에게 더 이상 죄를 짓는 일 없이 떳떳해 지니까 이렇게 마음이 편하고 좋은지 몰랐다. 천국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 사람 마음에 죄가 들어서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바로 그곳이 천국이었다.

 

 

나는 그해 여름의 신록과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산야의 단풍, 초록바지의 관심과 응원 속에서 공부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어 갈 수 있었다. 이제는 공부하는 터전이 잡혀감에 따라 하루에 밥 먹고 산책하고 공부하는 식으로 반복해도 무료하지 않았다. 하루에 16시간이상 공부에 매진하면서 전 과목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모의고사를 쳐 봐도 점수가 많이 올라서 합격에 대한 기대마저 가질 수 있었다. 내 책상의 화병 속에서는 온갖 빛깔과 냄새를 풍기는 꽃들이 다투어 피고 창 밖 울타리에서는 진한 탱자냄새가 진동했다. 책상 앞에서 창을 통해 바라다 본 탱자나무 울타리에는 참새들이 찾아와 쉴새 없이 찢고 까불어 대며 소란스럽게 놀다갔다. 순항하는 날들이었다. 공부도 사랑도 모든 일상들이...

 

 

가까이에 함께 공부하는 형들이 있고 가르치는 아이들이 있었으며 꽃과 산과 들과 호수처럼 드넓은 저수지가 있어 나는 늘 풍요로웠다. 하지만 사랑하는 연인을 멀리 두고 보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면서 공부에 매진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외로움만 이기면 모든 것을 할 수 있겠는데 그 외로움 앞에 흔들리고는 하였다. 당연 요양원 안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은 외로움이었다. 이곳 사람들, 환자나 간호사나 직원이나 모두 갇혀 있는 생활을 한다는 점에서는 수용자들이나 매 한가지였다. 고시생들 역시 자유를 유보하고 도 닦듯이 행동을 절제하며 정진 한다는 점에서는 수용자와 다름이 없었다. 다만 자율적으로 통제를 한다는 점만이 수용자와 달랐을 뿐이었다. 늘 이곳에서는 외로움과 그리움 같은 추상명사들이 우리들의 삶의 주변을 맴돌았다. 

 

 

요양원 수용자들을 돌보는 간호사들은 요양원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고 있는 세 명의 고시생들인 우리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 보았다. 그녀들은 우리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허구한 날 보는 것이 말썽을 피우는 골치 아픈 정신병 환자들뿐이어서 온통 신경을 써야 할 일들 뿐이었다. 그런데 법대를 나온 준수한 청년 3명이 요양원내에 들어와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뉴스거리가 아닐 수 없였다. 그녀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아저씨 집으로 놀러와 말을 걸면서 우리들의 동태를 살폈다. 어떤 날은 먹을 것을 들고 와서 이야기를 붙였고 또 다른 날에는 수용자들 사이에 일어난 골치 아픈 형사문제를 상담한다고 법공부를 하는 우리들을 찾아와 말을 거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이었고 그녀들의 생각에는 한 순간이라도 답답한 요양원 안에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들처럼 우리도 미혼이어서 그런지 아저씨 내외는 웃으면서 그녀들에게 고시생들인 우리들 하고 잘 해보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 간호사 김양은 나를 잘 따랐는데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가씨였다. 그녀들은 우리를 놓고 천 갈래 만 갈래 생각을 했겠지만 우리들은 공부하는 것이 무료할 때 그녀들과 재미삼아 만나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은 없었다. 특히 나는 초록바지와 사면바리 사건이후 몸단속을 하며 스스로 조신하게 처신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마음을 품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녀들이 일과를 마치는 시간 한 두 번 만나기도 했지만 언제나 우리 남자들은 정해진 선을 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크리스마스 날 저녁에도 우리 3명과 간호사 김양을 포함한 여자 3명이 요양원 안에 있는 빈 방에서 만나 조촐한 파티를 했었다. 포도주나 샴페인으로 목을 축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진철이 형이 갑자기 소등을 하자 방안은 갑자기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들끼리 미리 짠 작전이었는데 불이 나갔을 때 서로 좋아하는 상대를 찾아 안고 입을 맞추자는 것이었다. 물론 내 짝은 당연 김양이었다. 불이 꺼지자 방안에는 아우성 소리로 장난이 아니었다. 여자들은 놀래 소리를 지르며 난리 법석을 피우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한 순간 조용한 정적이 흐른 것은 그녀들도 우리를 거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김양의 허리를 안고 그녀의 유방을 내 가슴으로 누르며 안아 보았다. 다른 여자를 품는 다는 것은 늘 새로운 느낌이었다. 열 여자 싫어하는 남자가 없듯 초록바지를 안을 때와는 또다른 여자의 향기가 느껴졌다. 누군가 갑자기 방안의 불을 켰을 때 우리들은 죄인들처럼 얼굴을 붉히며 깔깔대며 웃었다.

 

 

자유를 유보당한 요양원내에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서로의 몸을 더듬으며 무언가를 그리워했다. 사람들뿐만 아니었다. 그곳에 살고있는 말못하는 짐승들도 그랬다. 축사에는 아저씨가 키우는 소가 열 댓 마리 있었는데 소들은 내동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수놈이 앞발을 치켜들고 암놈의 뒷 엉덩이에 올라타려는 듯 자신의 물건을 칼 뽑듯이 쭉 뽑은 후 암컷 엉덩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숫소의 그것이 몸속에서 나올 때에는 붉은 살점이었는데 마치 고무줄처럼 늘였다 폈다 할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숫놈이 엉켜들 때까지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암놈은 놀라 도망을 가는데 성질 급한 놈은 따라가면서 물총을 쏘듯이 정액을 허공에 쏘아대었다.

 어떤 날은 간호원과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녀들 중 김양은 얼굴을 붉히고 자리를 뜨기도 했지만 이양 같은 간호사는 내둥 웃으면서 그 모습을 한 참이나 재미난 듯 지켜보았다. 

 

 

그렇게 봄, 가을을 보내고 겨울의 초입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겨울을 싫어했다. 아니 겨울을 무서워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으리라. 아무래도 겨울에는 산책을 나오는 것도 횟수가 줄어들고 허구한 날 방에만 처 박혀 지내야 했다. 이곳 직원들도 수용자들이 먹을 김장을 비롯한 월동준비를 하느라 손발이 부르트는 고달픈 계절이었다. 하다못해 십 원이라도 연료비라도 더 들어가면 들어갔지 날이 추워 이곳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겨울은 없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계절이었다. 겨울에 시험이 있는 우리들에게는 심판의 계절이기도 했다. 가르치는 아이들은 잘 따라와 주었다. 나 역시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한 해를 그나마 의미 있게 마무리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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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아자아자

    정신병을 가진...요양원에서 공부를 한다?
    조금은 선입견이 자리해선지 과연 면학분위기가 조성되나...잘 적응한다니 다행이네요.

    사내가 다부지게 맘을 먹었으면 독기를 품고 정진해야지...인생 다 망가지기 직전에 그나마 살아났군요. 패가망신하지 않게. 하긴 사면바리로 인해 얼마나 혼이 다 빠졌을까나...
    초록바지는 아무일 없을 때도 일편단심였는데, 이젠 즐거운 합방은 아녔어도 몸을 나눈 사이니 더 새록새록 그 마음이 쌓이겠지요, 당연.

    2014.04.03 23:22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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