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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필수였고 성공은 운이었다.

 

연초에 있었던 시험에서 나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소송법 2번째 문제에서 개념을 잘못 잡아 엉뚱한 설명을 늘어놓았다는 자책감으로 시달렸지만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내년쯤에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모든 일은 내 생각과는 달리 진행되었다. 채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해에 있는 요양원에서 공부했던 3명 중에서 진철이 형의 제외한 나와 진철이 형의 친구가 이번 시험에 붙어 버린 것이다. 당연히 요양원에서는 난리가 났다. 어디서 소식을 접했는지 그곳 지서장이 찾아오고  원장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축하해 주었다. 요양원에 김양을 비롯한 직원들 간호사들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한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실수를 범해 올해는 안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내 생각과 달랐으니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좌절과 실패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정작 합격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오늘의 행운을 전원생활의 덕이었을 것이다. 전원에서의 생활은 그동안 뒤죽박죽이 되었던 나의 몸과 마음을 받아들여 치유해 주었으며 내가 가야만 할 길을 바로가게 해 주었다. 졸업하고 4년이 지나 합격했으니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그리 늦은 것도 빠른 것도 아니었다.

 

 

내가 레인코트나 초록바지와 같은 여자들을 사귀지 않았거나 강사생활 같은 부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합격은 더 빨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움도 미련도 없었다. 평소 아침 앞산으로 산행을 가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동네에서 가까운 앞산은 걸어서 왕복 2시간 거리였는데 나는 이제 마음이 푸근해 져서 그런지 산에 나 있는 길이란 길은 모두 걸어보았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 산길은 사방팔방에서 올라와서 그런지 정말 길이 많이 나 있었다. 시험을 마쳐 공부로 더 이상 쫒길 것도 없이 느긋해진 나는 길이 나있는 대로 모든 길들을 천천히 다 돌아 보았다. 그러자니 평소보다 시간이 2배나 더 걸렸다. 자꾸 샛길만 돌아다니다 보니 주객이 전도되어 이제는 주 등산로를 이용하기 조차 싫어졌다.

 

 나는 그동안의 내 처지가 이와 같지 않았을까 하는 깨달음이 왔다. 앞뒤 보지 말고, 옆으로 난 샛길도 보지 않고 내가 가야할 수험생활의 주된 코스를 향해 가야만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를 못했고 세상으로 난 길은 모두 가 보고 싶었다. 레인코트, 초록바지, 초등학교여선생, 미스고, 대기업임원사모님, 숏 타임 아가씨, 김양도 모두 나에게는 거쳐가야 할 길이었다. 그 결과 가던 길은 늦어지고 이제서야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바라던 목표지점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목표에 이르는 과정에서 느낄 수 없었던 세세한 정경까지 다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곳 전원에 와서 사람들의 발에 무수히 짓밟히는 풀들과 피었다 지는 꽃들과 요양원에 수용되어 갇힌 사회의 낙오자들을 보았다. 나는 그 들판을 매일 걸었고 그들과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고 이제는 내 뜻을 이루는 첫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스쳐지나온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내 삶의 좋은 거름들이 될 것으로 믿었다.

 

 

이제 김해 들녘에는 한 동안 이 땅을 얼게 만들었던 겨울이 물러가고 아주 서서히 봄이 오고 있었다. 아침마다 밤새 내린 이슬이 풀리면서 뿌연 안개와 더불어 봄기운이 되살아났다. 그 속에서는 민들레며 쑥이며 입맛을 돋우는 나물들이 지천에서 올라와 어김없이 봄이 왔음을 알렸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에 삶의 희망을 가지고 출발하는 나 같은 사람은 럭키한 사람이었다. 이 좋은 계절을 넘지 못하고 봄의 목전에서 쓰러진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있었다. 

 

 

나는 함께 공부했던 진철이 형에게 미안함을 전하면서 내년에 합격을 기원해 주었다. 그리고 초록바지에게도 합격사실을 알렸다.  이럴 때 레인코트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지 않고 그대로 내 곁에 있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누구보다도 내 합격을 위해 헌신했던 것은 레인코트였기 때문이었다. 레인코트는 많은 헌신을 하고도 진정 합격의 순간에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반면 초록바지는 애당초 내가 시험공부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고 내가 시험에 합격할 경우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자한테 갈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험공부가 힘들면 그 힘든 공부를 그만 두라고 하여 나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일이 이렇게 되면서 재미있는 일은 어디서 내 연락처를 알게 되었는지 마담 뚜 들에게서 중신자리가 계속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마 시험에 합격하면 누군가가 시험주관 부서나 입소 등록을 받는 연수원 측으로부터 명단을 빼내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자동차, 아파트, 사무실의 열쇄 3개를 제시하며 이런 저런 사람들을 계속 소개해왔다.

 

 엄마와 아버지는 내가 공부를 하는 동안 레인코트를 사귀었고 그녀와 헤어진 이후로는 초록바지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의 경우 실제 초록바지와 내가 공부하는 김해로도 찾아오기까지 해서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초록바지의 집안 보다 비교가 안 되는 좋은 조건의 집안과 중신이 들어오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시험에 합격을 하기 전에 사귄 것이니까 이제 합격을 하고 나서는 거기에 상응한 상대를 만나야 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아버지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엄마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혼은 양쪽을 저울지하면서 이루어지는 거래였다. 사람들은 결혼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성스럽게 이야기들을 했지만 결국 까놓고 보면 거래였다.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을 만나 못난 사람의 부족함을 매워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만 고만한 사람들 끼리 조건과 조건을 맞추기에 급급한 거래. 이런 거래는 거래를 마친 후에도 흠이 있을 경우 계약이 밥 먹듯이 파기되는 것이 다반사일 것이다. 내가 모르는 세상들이 많았다. 선을 보고 우리 측에서 답변을 하지 않으면 뭔가 부족해서 그런다는 생각을 했는지 종전 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 오기도 했다. 

 

나는 부모들의 성화를 못 이겨 그런 선을 몇 번 보았다. 오늘도 선 자리와 만남이 있었다. 내가 만날 여자는 모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아가씨였는데 아버지가 건설업을 하고 시의원을 몇 번한 지역의 부호였다. 장인이 될 사람은 건설업을 수 십 년 동안 한 덕분에 재산이 많았으며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 공천을 받기 위해 줄을 대고 있었다. 그는 이런 저런 직함을 잔뜩 박아 놓은 명함을 부지런히 돌리며 지역 텃밭을 관리해 오고 있었다. 상대 아가씨는 아버지가 돈을 버느라 고생을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아서 그런지 내가 사업하는 남자가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마음 씀씀이는 괞찮은 것 같았고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다든지 똑똑하다든지 하는 것은 아닌 수수한 아가씨였다. 다만 수 백 억 원이 된다는 장인 자리의 뒷 배경이 그 여자와 맞선을 보게 된 이유였다. 나는 장인 될 사람의 요청에 따라 그가 나오라는 곳으로 가서 따로 만나기도 했다.

 

 

 

- 요번에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을 합격했다지요?

 

 

- 예, 운이 좀 좋았습니다.

 

 

- 그게 운으만 될 일인가?  하지만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슨 일을 하려고 들면 하늘이 도아 주어야만 하지. 내가 하고 있는 사업이나 정치도 그렇고 ...

 

 

- 그래 장차 꿈이 뭡니까? 어디 한 번 말해 봐요.

 

 

- 아직 잘 모르지만 좋은 법관이 되고 싶습니다...

 

 

- 좋은 법관이라, 거 좋지, 나도 판사들 많이 만나봐서 알아요.

 

 

- 그런 거 말고 좀 구체적으로 말해봐요. 나는 자네같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 세상에는 힘이 있어야만 해요! 내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내가 자네 뒷바라지를 다 하지. 집도 차도 그리고 다른 생각 안해도 좋을 만큼 생활비도 넉넉하게 매달 보태 줄 수도 있어요!, 물론 이건 다 내 딸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지만. 필요할 때 힘이 되어 주고 나중에 변호사 나오면 사무실도 번듯하게 내어 주는 것을 약속하지, 어때요? 나는 자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깐 ...

 

 

- 말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나는 때묻은 어른들이 역겨웠다.

 

장인 될 사람은 낚시꾼이나 낚시꾼을 감독하는 사람을 곁에서 두고 싶어했을 것이다. 자기는 흐린 물속을 자기 마음대로 헤짓고 다니고 싶은데 낚시 대를 들이대고 자기네를 잡아 올리려고 하니까 방해 받지 않기 위해 낚시꾼이나 감독자를 친구나 사위로 두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자네 같은 젊은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훤하게 알고 있다"는 그 소리가 못마땅했다. 나는 그가 지금껏 자신의 욕망을 위해 마구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고 나를 곁에 두며 이용해 먹으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쳇말로 출세라는 것을 해 놓고 보니까 내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이런 저런 흥정을 해오는 것을 보며 사회가 얼마만큼 흐렸는가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지어 결혼마저 이러니 다른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뭐든지 아무것도 모를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세한 자를 전제로 하는 맞선은 성격이 거의 비슷했다. 포장이야 아닌 것처럼 이렇게 저렇게들 둘러대어서 말들을 했지만 결국 한 보따리 챙겨 줄테니 나랑 결혼하자는 노골적인 요구였다. 내가 선을 보러 나갔다 올 때 마다 부모님들은 세상 편하게 살 수 있는 처가와 맺어 지기를 기대하는 눈치가 선연했다.

 

 

내가 이런 선 자리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자 특히 엄마는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엄마는 어떻게 너를 키워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데 그렇게 못난 생각을 하느냐며 실망스러워했다. 어떤 날은 잔뜩 화가 났는지 못사는 집에 태어났으면 팔자를 고칠 기회가 왔는데도 잡지를 못한다면서 병신 같은 자식이라고 노골적으로 분을 내기도 했다. 아버지 역시 마음속으로는 엄마와 같은 생각이었겠지만 직접적으로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현실적인 판단을 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시험을 치고 나서 남는 것이 시간이었다. 이참에 대학교 2학년 때 잠시 짬을 내어 따놓았던 운전면허 도로 연수를 하기로 했다. 마침 형님이 타던 차를 바꾸게 되었는데 그 차를 합격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었다. 장롱면허를 써먹을 심사로 도로 연수 받았고 운전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운동신경이 좋아 그런지 차를 곧장 잘 몰고 다녔다. 나는 속도광이었다. 차를 가지고 낙동강변 산업도로와 같은 한적한 곳으로 드라이브를 나가서 속도를 내고 달리면 가슴에 맺힌 응어리들이 풀어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튼 핸들을 잡으면 쌩쌩 달려야 직성이 풀렸다. 사람들은 내 차를 타면 좀 천천히 달리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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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아자아자

    합격을 해도 다른 고민이 생기는군요.
    현실이 녹록치 않으니 타협하라는 의미 같아서, 여간 심지가 굳은 사랑이 아니라면 힘들겠네요. 첫 몸을 섞어선지 퍼뜩하면 레인코트나 떠올리는 강산...

    2014.04.11 14:48 댓글쓰기
  • 열정

    합격이 다 인줄 알았으나 또 다른 고민들이 고개를 내미는 것이 세상입니다. 합격을 가장 원하고 바랬던 것이 레인코트였고 그것을 못이루어 헤어졌기 때문에 레인코트가 생각날 수 밖에요...

    2014.04.11 19:09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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